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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기병의 유럽 정복을 막은 것은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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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그 어느 정복자보다도 더 넓은 영토와 국가를 점령했던 칭기즈 칸. 칭기즈 칸 사후에도 몽골 제국은 확장을 거듭했다. 칭기즈 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은 아버지의 정복 사업을 물려받아 동쪽으로는 중국 서북부까지, 서로는 동유럽까지 진출했다.

몽골의 기병대는 파죽지세로 현재의 우크라이나를 지나 1241년 헝가리까지 진격했다. 당시 1백만 명의 달하는 헝가리인들이 몽골에 의해 살육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런데 몽골군은 1242년 갑자기 헝가리에서 후퇴한다. 당시 몽골의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는 상태. 아직까지도 헝가리 정복을 눈 앞에 두고 있었던 몽골이 왜 후퇴했는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최근 기후 변화가 몽골의 후퇴에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스위스산림연구원의 울프 뷘트겐과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니콜라 디 코스모가 '네이처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게재한 논문이 바로 그것.

연 구자들은 헝가리 지역의 산림에서 추출한 나이테와 역사 기록을 비교하여 1230~1250년 시기의 기후를 연구했다. 그 결과 1238년부터 1241년에는 온화하고 건조한 여름이 계속되다가 1242년 초부터 갑작스레 춥고 습한 기후로 바뀌었다는 걸 발견했다.

이로 인해 헝가리 지역은 습지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습지 지형은 기동성이 생명이었던 몽골의 기병대를 약화시켰고 말의 먹이였던 풀이 잘 자라지 않아 기병대의 유지에도 큰 어려움이 생겼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논문은 "우리의 '환경적 요인의 가설'은 기후의 작은 변화가 역사적 사건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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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돌마다 ‘아픈 역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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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4월 부산 동래구 수안동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동래읍성 유적. 처참했던 1592년 음력 4월15일 동래읍성 전투상황을 그대로 간직한 유적이다. 경남문화재연구원 제공
2005년 4월 부산 동래구 수안동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동래읍성 유적. 처참했던 1592년 음력 4월15일 동래읍성 전투상황을 그대로 간직한 유적이다. 경남문화재연구원 제공
역사의 블랙박스 ‘왜성 재발견’ ③ 동래왜성

2005년 4월 부산 동래구 수안동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건설현장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조선시대 동래읍성 주위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성곽 방어시설 ‘해자’가 발견된 것이다. 경남문화재연구원은 곧바로 발굴조사에 들어갔다. 성곽을 따라 땅을 길게 판 해자에선 철판을 이어 만든 갑옷과 투구, 환도, 창, 화살촉 등 전투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놀라운 것은 전쟁의 처참한 흔적이 남아 있는 사람뼈였다. 해자 밑바닥에선 남자 59명, 여자 21명, 어린이 1명 등 모두 81명의 뼈가 발굴됐다. 이 가운데 8명의 두개골에선 칼에 베이거나, 활이나 총, 둔기 등에 맞은 흔적이 드러났다 뒤쪽에 구멍이 뚫린 20~40대로 추정되는 남자의 두개골, 두 차례나 칼로 잘려나간 흔적이 남아있는 20대 여성 두개골 등이 발견됐다. 총이나 활이 관통한 5살가량 어린아이의 두개골도 나왔다.
동래읍성과 왜성 옛 모습과 현재 위치도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고고학계는 발굴된 사람뼈의 평균키와 생김새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이들은 모두 조선인이며, 1592년 음력 4월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상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밝혔다. 임진왜란 유적에서 처음으로 사람뼈가 나온 것이다. 임진왜란 전 조선군 보급물품과 일본 창이 발견됐다는 점도 임진왜란의 전투 흔적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학계는 “5살가량 어린이 두개골에서 확인되는 상흔과 경사도, 깨진 정도를 종합하면 왜군의 조총 탄환이나 유탄을 맞아 숨진 것으로 보인다. 20대 여성의 전두골은 칼로 예리하게 잘려 있고, 두정골에도 칼로 베인 흔적이 있다. 각도를 볼 때 고개 숙인 여인을 왜군이 칼로 내리친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왜군에 끝까지 저항하다 스러져간 조선 백성들의 주검이 동래읍성 해자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것이다. 잊혀진 조선 백성들은 이렇게 400여년만에 세상에 나왔다. ■ 동래읍성 전투 왜군은 부산진성을 함락한 다음날인 1592년 음력 4월15일 부산의 국방·행정 중심지이던 동래읍성에 이르렀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동래읍성 남문에 올라 성문을 굳게 닫고 전투준비를 했다. 그러나 경상좌도의 육군사령관 격인 경상좌병사 이각은 구름같이 몰려드는 왜군을 보고 “나는 대장이니 성 밖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송 부사는 이곳을 지키시오”라며 성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부하들도 “일단 물러나서 험한 지형에 의지해 적을 막자”고 건의했다. “성주가 성을 지키지 않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송상현 부사가 일갈했다.
부산 동래읍성 전투 장면을 묘사한 동래부순절도. 1760년(영조 36년) 변박이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송상현 동래부사가 왜군과 대치하는 모습, 경상좌병사 이각이 달아나는 장면 등이 그려져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부산 동래읍성 전투 장면을 묘사한 동래부순절도. 1760년(영조 36년) 변박이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송상현 동래부사가 왜군과 대치하는 모습, 경상좌병사 이각이 달아나는 장면 등이 그려져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당시 조선의 방위전략인 ‘제승방략’(유사시 각 고을 수령이 군사를 이끌고 약속된 방어지역으로 집결하는 병력동원 방식)에 따라 경남 양산군수 조영규, 울산군수 이언성이 소수의 병사를 이끌고 동래읍성에 도착했다. 하지만 수영구 수영동에 있던 경상좌수영의 좌수사 박홍은 울산 언양 쪽으로 물러났다. 나머지 고을이나 진성에서도 구원군은 오지 않았다. 왜군은 100여명의 선발대를 보내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내달라”고 적은 목판을 동래읍성 남문 쪽에 세웠다. 송상현 부사는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주기는 어렵다”고 적은 목판을 왜군 쪽에 던졌다. 2005년 부산 수안역 건설현장서
동래읍성 전투 81명 유골 나와
탄환에…칼에…처참하게 스러져
함락시킨뒤 그 돌로 왜성 쌓아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은 동래읍성을 에워싼 뒤 동·서·남쪽에서 공격했다. 전투를 시작하고 반나절 만에 왜군은 동래읍성 동북쪽 성벽을 파괴하고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성안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효종 때 동래부사로 재직했던 민정중이 1668년에 쓴 <임진동래유사>에서 “성은 좁고 사람은 많은데 적병 수만명이 일시에 성으로 다투어 들어오니 움직일 수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전북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은 임진왜란 야사 <난중잡록>에서 “송상현은 ‘이웃나라의 도리라는 것이 이런 것이냐? 우리가 너희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너희들의 이같은 침략행위가 도리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느냐’며 왜군을 꾸짖은 뒤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고 기록했다.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 권59)엔 왜장들도 송상현의 절의에 탄복했다고 기록돼 있다.
2005년 4월 부산 동래구 수안동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동래읍성 유적. 처참했던 1592년 음력 4월15일 동래읍성 전투상황을 그대로 간직한 유적이다.  경남문화재연구원 제공
2005년 4월 부산 동래구 수안동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동래읍성 유적. 처참했던 1592년 음력 4월15일 동래읍성 전투상황을 그대로 간직한 유적이다. 경남문화재연구원 제공
동래읍성 백성들도 힘껏 싸웠다. 백성들은 낫과 도끼 등 농기구를 들거나 맨주먹으로 왜군에 맞섰다. 아녀자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뜯어 왜군에게 던졌다. 왜군은 동래읍성 백성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1608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은 <동래맹화유감>에 “4월15일 저녁 집집마다 곡소리가 났다. 임진년 때 성이 함락된 날이다. 송상현 부사를 좇아 읍성에 모였던 백성들은 같은 시간에 피바다로 변했다. 살아남은 자들이 전쟁에서 죽은 가족을 제사하고 통곡한다. 왜군에 일가족이 몰살당해 곡해 줄 가족조차 남기지 못한 집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른다. 눈물이 줄줄 흐른다”고 적었다. 동래읍성의 처절한 전투 소식은 조선 백성들의 피를 끓게 했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동래는 ‘충절의 고장’이 됐다.
2005년 4월 부산 동래구 수안동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동래읍성 유적에서 나온 두개골. 경남문화재연구원 제공
2005년 4월 부산 동래구 수안동 부산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발견된 동래읍성 유적에서 나온 두개골. 경남문화재연구원 제공
■ 동래왜성 왜군은 동래읍성을 함락시킨 뒤 동래읍성 동헌에서 동쪽으로 700여m 떨어진 구릉 꼭대기에 동래왜성을 쌓았다. 임진강·행주대첩·2차 진주성·울산성 전투 등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굵직굵직한 싸움에 참전했던 킷가와 히로이에(吉川廣家)가 이 왜성을 만들어 머물렀다. 그는 왜군 장수 중에 가장 많은 3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와서 부산 증산왜성 등을 쌓은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의 사촌이다. 킷가와는 모리 가문의 선봉대를 맡았는데, 자신의 공적을 쌓기 위해 조선인의 코를 베어가는 왜장으로 악명이 높았다. <킷가와 가문 문서>에는 그가 1597년 9월1~26일까지 전라도 일대에서 조선군의 코 1만4800여개를 베어갔다고 기록돼 있다. 학계는 조선군의 코가 아니라 아녀자와 노약자 등 조선 백성들의 코를 베어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동래왜성 터는 현 동래읍성 동장대를 축으로 동남쪽에 있는 충렬사(부산시지정 유형문화재 제7호)까지 비스듬하게 자리잡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부산 동래구 칠산동과 안락동에 걸쳐 있다. 현재 동래왜성은 터만 남아 있어 1곽만 확인되고, 나머지 곽은 구분이 어려운 상태이다. 동래왜성 일부 구역은 도로(충장대로) 건너편 남쪽에 있는데,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부산 동래구 안락동 충렬사의 모습. 충렬사는 동래왜성 터와 맞붙어 있다. 김영동 기자
부산 동래구 안락동 충렬사의 모습. 충렬사는 동래왜성 터와 맞붙어 있다. 김영동 기자
강이나 바다 근처 구릉에 있는 대부분 왜성과 달리 동래왜성은 내륙에 깊숙히 들어와 있다. 학계는 왜군이 부산의 국방·행정 중심지였던 동래에 병참선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내륙에 동래왜성을 쌓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왜군은 동래왜성을 쌓으며 1446년(세종 28년) 세워진 옛 동래읍성을 파괴해 석재를 조달했다. 조선은 1731년(영조 7년) 옛 동래읍성의 6배 규모로 새 동래읍성을 건설하며 동래왜성 성벽의 돌을 가져다 사용했다. 왜군은 동래왜성을 쌓으며 옛 동래읍성의 돌을 재활용했고, 조선은 새 동래읍성을 쌓으며 동래왜성의 돌을 또다시 재활용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 동래왜성에 석축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영조때 다시 왜성 성벽 돌 재활용
옛 동래읍성 6배 규모로 건설
동장대서 나온 조선 기와 모양
왜군이 일본 돌아가 본떠 쓰기도
산책길을 따라 충렬사 뒤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길 양쪽에 편편한 공간들이 계단식으로 배치돼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나동욱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은 “병사를 배치해 성을 방어했던 ‘곡륜’으로, 왜성 터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말했다. 동래왜성 2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엔 조선시대 군관들의 집무소인 군관청(부산시지정 유형문화재 제21호)이 들어서 있다. 동래구 수안동 동래교차로 근처에 있던 것을 1982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동래왜성 2곽 추정 지역을 지나 구릉 꼭대기로 올라가면, 1곽이 나온다. 전투지휘소인 천수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에 새 동래읍성의 동장대가 세워졌다. 해운대, 기장, 구포 등 부산 외곽으로 가는 길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동장대 동쪽 비탈엔 30~40m 길이의 해자가 보인다. 1979년 동장대 복원공사 당시 이곳에서 조선 기와가 나왔는데, 공교롭게도 임진왜란 때 왜군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일본에 돌아가 세운 구마모토(熊本) 무기시마(麥島)성 천수각에서 같은 제작틀로 만든 기와가 출토됐다. 나 팀장은 “동래에서 가져간 것을 본보기로 만든 기와를 일본성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부산 동래구 칠산동에 있는 동래읍성의 동장대. 임진왜란 때 왜군은 이곳에 동래왜성의 전투지휘소인 천수각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영동 기자
부산 동래구 칠산동에 있는 동래읍성의 동장대. 임진왜란 때 왜군은 이곳에 동래왜성의 전투지휘소인 천수각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영동 기자
충렬사 청원경찰에게 부탁해 동장대 근처 쇠창살 문을 열고 충렬사 경내로 들어가 동래구 칠산동 쪽으로 내려가니, 동래사적공원의 구릉을 타고 길게 늘어서 있는 새 동래읍성 복원 성벽이 보인다. 새 동래읍성의 문 가운데 하나인 ‘인생문’도 저 멀리 보일듯 말듯하다. 인생문이라는 이름 유래는 임진왜란 당시 인생문 고개를 통해 도망간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기 때문이라는 설과,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에서 죽은 주검들을 성 밖 묘지로 옮기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인생문은 1731년(영조 7년) 새로 만든 동래읍성에 딸린 문으로 1592년(선조 25년) 일어난 임진왜란과는 관련이 없다. 임진왜란 때 억울하고 처절했던 조선 백성 사연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내용이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산 동래구는 2005년 3월 11억원을 들여 인생문을 복원했다. 그런데 지난 17일 내린 비로 인생문 안쪽 성벽과 담장이 무너졌다. 400여년 전 전쟁 중에 손으로 쌓은 성벽보다 부실하게 복원한 것이다. 주민들은 성벽에 붙은 화강암 판석이 들뜨고 곳곳이 균열돼 지난해부터 안전성 문제와 부실공사 의혹을 주장한 바 있다. 동래구는 정밀안전진단과 설계가 마무리되는 내년 1월에야 재복원 공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동래왜성 2곽 추정지역에 있는 부산시지정 유형문화재 제21호 군관청. 조선시대 군관들의 집무소이다. 군관청은 동래구 수안동 동래교차로 근처에 있었는데, 1982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김영동 기자
동래왜성 2곽 추정지역에 있는 부산시지정 유형문화재 제21호 군관청. 조선시대 군관들의 집무소이다. 군관청은 동래구 수안동 동래교차로 근처에 있었는데, 1982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김영동 기자
부산의 한 고고학자는 “부산시와 동래구는 칼로 잘라 벽돌처럼 만든 돌로 성벽을 쌓은 뒤 ‘동래읍성을 복원했다’고 홍보하고 있다.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것이 더 나은 보존일 듯하다”고 비판했다. 동래왜성 주소: 부산 동래구 칠산동 산 2-30 일대. 근처 관광명소: 동래읍성, 동래시장, 동래온천, 금강공원, 충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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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기록에 나타난 명랑 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