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헤어진 후 난 세류동쪽으로 터벅터벅 길을 걸었다.

지혜한텐 이미 늦게라도 들르겠다고 전화를 해놓았었다.

지혜는 전에 남양주 같은 동네에 살았었다.

유난히 눈이 크고 머리는 늘 긴머리를 하고 다녔었다.

집안끼리도 서로 잘 알아 어렸을적 부터 왕래가 많았다.

오빠오빠 하면서 잘 따르는 그녀가 예전부터 싫치 않았었다.

아마 그런 감정이었으리라!

내게 동생이 없다보니 그런쪽의....

지혜가 고등학교 들어간 후 얼마 안있어 그녀 아버지는 직장을 수원으로 옮겼고 당연히 지혜도 전학을 갔다.

그런데 그땐 몰랐는데 그녀를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언젠가부터 마음 한 구석이 텅빈것 같은 기분이 들기시작했고 가끔씩 그녀의 얼굴도 불현듯이 떠오르곤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서 얼마 안 있을때였다.

춘천에 다녀오다 기차 차창밖을 내다보니 파란 하늘과 강물이 어울어져 조금 감상에 젖었었나보다. 그때 그냥 갑자기 지혜가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도 모르게 노트와 볼펜하나를 꺼내들었고 덜컹거리는 완행열차안에서 나는

편지를 쓰기시작했다.

그러나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를 반복했을 뿐...

목적지에 다가도록 나는 편지를 완성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그리움만 머릿속에 물밀듯이 스며들어왔다. 

결국 나는 내려야 할 곳에서 내리질 못하고 종착역인 청량리까지 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무작정 수원행 전철을 탔고 사전에 들은 약도를 토대로 물어물어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그녀의 어머니는 당시 큰길옆 집딸린 상점을 하나 운영하셨는데 어쩐 일이냐며, 아주 반갑게  맞아 주셨던것같다.

"예, 시간이 나서 놀러 왔습니다, 지혜는요 ?"

"응, 학교에서 아직 안왔어!, 지금쯤 올때가 됐는데, 학교쪽으로 한번 가보련?"

"예, 할 일도 없는데 그러죠!...뭐...."

그런데 이게 실수였다.

나는 무료한 시간도 달랠겸 그녀를 깜짝 놀래켜 주려고 그녀의 학교를 찾았던 것인데, 친구들과 함께 나오는 지혜의 표정은 오랬만에 만나 반갑다는 표정이 아니라  뭔가 내게 화가 단단히 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대꾸도 안하고 토라져서는 저만치 앞서 그녀는 걸어가고 있었다.

                    3

지혜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통 나올 생각을 안했다.

"지혜야!...왜 그래?

문 좀 열고 말을 좀 해봐!

너 오랜만에 온 오빠한테 이럴 수 있는거니?"

나는 답답해서 마침내 상점에서 일하시던 지혜 어머니한테 달려가  왜 지혜가 그러냐고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너 아까 지혜 학교에 갔었지?"

"예,그런데요?"

"애들이 지혜 애인 왔다고 한바탕 난리 법석을 떨었나보더라!"

"예?

전 지혜 오빠라고하면서 어떤애한테 끝나는시간 물어본적밖에 없는데요."

"애들이 그걸 믿니?

요즘 애들이 어떤데..."

나는 한동안 고민하다가 저녁을 먹고 시간이 좀 흐른 후 미안하다고 내 눈치 없음을 사과했고 그녀도 그때쯤엔 자신도 너무했다 싶었는지 이내 화가 풀어졌다.

그리곤 대학생활이 어떻냐는둥, 미팅은 해봤냐는둥 질문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야기에 심취해있는동안 시간이 흐르던중 어느사인가모르게 그녀는 내무릎위에 앉아있었다.

항상 그랬듯이 지혜는 스스럼이 없었다.

꽤 오랬동안의 서먹서먹한 시간의 갭이란것도 이렇게 짧은 조우앞에 쉽게 무너질수 있다는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깊어 줄곧 내게 기대있던 지혜는 피곤했는지 어느순간 잠이 들었고 나는 가만히 그녀를 자리에 누이고 이불을 덮어주고 나왔다.

다음날 이른 새벽 나는 그녀의 집을 나섰다.

그녀의 친가가 아직 우리동네에 있었기때문에 주말에 가끔 그녀는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녀의 끝도 없는 재잘거림이 좋았다.

그러다 나는 군에 입대했다.

군에 있을때 지혜는 친구와 같이 몇번 면회를 왔다.

나는 몇일 밤을 새서 파일을 이용한 그림 앨범을 만들어서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었다.

내가 국방의 의무를 다할 무렵 이미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해서 작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제대해서 사회에 첫발을 딛는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됐고 이젠 부쩍 커버려 숙녀가 되어있는 그녀는 오히려 낯선 느낌을 줬다.

몸가짐도 조심스러워졌고 나를 대하는 태도도 전같진 않았다.

이런게 여자의 변신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약간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4

"오빠!...이제 군대하고는 영원히 빠이빠이야?"

"응!, 예비군 훈련이 남아있지만 그까짓거야 ~뭐.

근데, 그간 안본 사이 너...많이 이뻐졌다!

이제 시집가도 되겠는데그래!"

"몰라!

오빠 미워..."

"어때?

직장 생활은 할 만하니?"

"응!

그럭저럭!"

지혜 어머니가 차려줘서 술을 한잔 했다.

그녀는 군대에서 있었던 일을 재미 있는듯 자꾸 꼬치꼬치 캐물었다.

"으악!...그 지겨운 놈의 군대에 대해 또 얘길 해야되다니!"

하지만 뭐, 지나고 나면 전부 그리운 추억으로 떠오르듯 훈련시절 얻어맞아 쌍코피

터진 얘기며 더럽게 청소했다고 맨손으로 소변기를 닦게했던 악면높던 교관얘기등등을 나는 남얘기하듯 쉬지않고 뱉어내고있었다.

다시 생각하니 조금 열이 뻗쳐올라오는데 지혜는 깔깔대며 웃었다.

"음! 이제 밤도 깊었으니 이제 그만 자라.

그리고 나 내일 아침 일찍 가야되니까 미리 작별인사 하자."

"응!

주말엔 나도 시간이 나니까 기회봐서 오빠네 놀러갈께!"

그리고 한달이 지난 후 어느 토요일날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물론 명분상으로는 남양주에 아직 사시는 할머니댁에 인사오면서 잠깐 들른 것이었다.

저녁 시간이었다.

이제는 다 커서 숙녀가 된 지혜를 오랫동안 붙잡고 있는게 주변사람들에게 눈치가 보여 긴얘기도 못하고 그날은 차한잔 할 시간 동안만 같이 있다가 그냥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이 일요일이라 시내로 같이 놀러나갔다.

"우리 어디 갈까?

너 가고 싶은데 없니?"

"난 그냥 오빠가 가자는데로 갈께!"

근데 그때 내가 즐겨 가는곳이 남산이었다.

예전에 도서관도 그쪽으로 좀 다녔고 경치도 좋아 괜찮을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지혜한텐 좀 무리였던것같다.

그녀를 그 가파른 남산 계단길로 끌고 올라갔으니 내가 생각해도 센스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냥 영화나 보고 점심먹고 산책이나 할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중간에 그녀가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좀 난감했는데 그래도 끝까지 가겠다고 우겼고 업어준대도 싫다고했다.

어쨋든 정상까지 올라갔을때 그녀는 무척 피곤해 보였다.

간단히 점심 끼니 때우고 잠깐 경치 구경하면서 벤취에 앉아 쉬다가 왔던 길로 다시 내려왔다. 

영화 한편 같이 볼려고 했더니 지혜는 그냥 집에 가고싶어했다.

생각보다는 몸이 좀 약했던지 얼굴도 좀 창백해보였다.

"괜찮겠니?"

"응!

집에 가서 좀 쉬면 괜찮을거야!"

혹시 직장 생활이 너무 힘든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수원행 전철표를 끊어주고 좀 걱정은 됐지만 나도 이내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나름대로 바쁜 생활을 했다.

복학준비와 알바, 그리고 가끔씩은 친구들과 술먹느냐고 시쳇말로 오줌누고 *볼 시간도 없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어느날 집에 돌아오면 지혜가 다녀갔다는 소리는 몇번 들었다.

나도 가끔 지혜가 떠올랐지만 특별히 그녀를 만나기위한 어떤 조치나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5

자유라는 이름의 공백기간이 채워지고 마침내 복학 시즌이 되었다.

난 재수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알바하면서도 틈틈히 책을 들여다 보았다.

당시 형이 운영하는 대리점에서 알바하던 나는 주로 돈줄이 형한테 있었으므로 항상 형의 눈치를 살폈었다.

그 형이 내가 재수하려는 걸 눈치채고 강제로 복학수속을 밟아버렸다.

울며 겨자먹기로 춘천까지 학교를 다니는데 마음이 딴곳에 있다보니 공부는 뒷전이고 춘천바닥을 주로 놀러 다니고 술먹는데 시간을 탕진했다.

그때가 내겐 1차 방황의 시기였던것 같다.

나중에 결국 학교때려치고 타대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그러던 어느 토요일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다음 날 느즈막히 일어났는데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지혜가 찾아왔다.

"오빠!"

"응?

지혜구나! 언제 왔니?"

"응!

어제!

어제 저녁에도 왔었는데 오빠가 없더라구!"

"그랬구나!

잠깐만 기다려!

내 준비하고 금방 나올께!"

.........................

"우리 어디 갈까?

시내 나갈까?

내가 전번처럼은 고생 안시킬께!

진짜루~"

"아니, 오빠랑 조용히 얘기 좀 하고 싶어!"

그때서야 난 정색을 하고 그녀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흰색 투피스에 힐을 신고, 머리는 긴 생머리 그대로인데, 얼굴엔 전엔 없었던 엷은 화장끼가 묻어 있었다.

참, 여자는 천의 얼굴을 가졌다더니 그녀는 전에 내가 알던 지혜와 많이 달라 보였다.

원래 잘 웃고 잘 까불던 애였는데 그 날만큼은 웬지 낯설게 느껴졌다.

"음!...그럼 우리 산책할까?"

우리는 마을을 벗어나 하천길을 따라 이어져있는 저수지 모양의 연못둑방길을 걸었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주로 내가 얘기하면 간간히 고개를 끄떡이거나 짧게 '응!'하는 희미한 응답밖에는... 

그녀는 연못의 물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잔물결이 일어났고 출처를 확인하기 어려운 풀과 나뭇닢 몇개가 물결따라 떠다녔다.

인적이 뜸했고 길고 곧게 뻗어있는 미류나무들이 군데군데 서있어 그나마 멀리서도 시야가 가리는 위치에 우리는 말없이 얼마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 몇가닥이 얼굴에 흘러 내려왔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올려주었다.

얼굴을 만지는 그 순간 그녀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연한 맆스틱을 가볍게 바른 그녀의 입술은 조금 벌려져 있었고 뭔가를 말하려는듯 했다.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다가 나는 갑자기 그녀의 두눈이 감겨져 있는걸 보았다.

언뜻 영화장면이 생각났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가 눈을 감으면 키스해달라는 의사표시라는 것을...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그 짧은 시간에 갖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치 영겁의 시간이 흐른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느껴졌다.

그리고 난 결국 키스를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때까지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으므로 그녀에게 키스하는것은 뭔가 죄를 짓는것만 같았다.

마침내 그녀는 조용히 눈을 떴고 약간은 원망섞인, 그리고 이내 쓸쓸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원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내 그녀가 똑바로 내얼굴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얘가 오늘 왜그러지?"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갑작스러운 상황은 뭔가 우리들의 예전 분위기를 닮지 않아서인지 나를 내내 당혹스럽게 만들고있었다. 

그녀는 슬픈듯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말했다.

"엄마가 선보래!"

"뭐?"

"나 어떡하지?"

나는 아무 대답도 안했다.

그녀는 나에게 확답을 원했던것 같다.

시간이 오래 걸리드래도 나를 기다려도 되는지를....

다행히 그녀의 어머니는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딸이 원하면 그러마해주실거라는 기대하에 그녀는 지금 나에게 묻고 있는것이였다.

뭐가 내 마음을 그렇게 짓눌렀는지....

나는 그저 나 자신에게 화가 났고 그녀의 행동도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지금 내 처지에 무슨....

그렇다고 멀쩡한 아가씨를 무작정 기다려달라고 말하기는 더욱 싫었다.

결국 나는 그녀를 그냥 그렇게 보내고 말았다.

나에게 그녀는 첫사랑이었던것 같다.

물론 그때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먼 훗날 언뜻언뜻 그녀의 기억이 아프게 떠오를때면 ....

내가 그래도 젊고 순수함을 간직한 젊은 날에.... 

그녀를 정말로 무조건적으로 사랑했던것은 아닌가 반문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