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골 동네에 한 소년이 살았다. 

동족상잔의 6,25 사변이 끝나고 군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명분하에 배움이 부족한 사람들에 대해 획일적인 일제 강제 제대 조치가 취해졌다.

일종의 토사구팽이었다.

당시 소년의 아버지는 육군헌병상사로 비록 젊은 나이였지만 그도 이 조치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제대 후 아버지는 농가만 서너 채가 들어서 있는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좀 어려운 깊은 산 밑에 허름한 집을 짓고 토끼를 키우셨다.    

소년은 거기서 태어났다.

소년은 외로웠다.

소년은 매일 혼자 놀았다.

체를 들고 냇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는데 시간을 보내거나 산에 올라가 작은 새를 쫓아다니거나 찔레순 등을 뜯어먹으며 노는 게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 동네에도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둘이나 더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소년 네보다도 나중에 이사 온 애들인 것 같았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들은 여자 애들이었다.

게다가 둘 다 소년보다 한 살 씩 많았다.

소년은 그녀들과 어울리기 위해 기회를 노려 접근했다.

작업은 일시 성공하는 것 같았다.

처음엔 그녀들도 잘 놀아줬다.

주로 소꿉 장난 공기돌 놀이 혹은 고무줄 놀이 같은 시시한 것들 뿐이었지만....

하지만 소년은 기뻤다.

말 상대가 생겼다는 자체만으로도 소년에겐 큰 소득이었다.

그녀들에게 충성을 다했다.

힘든 일 하라면 하고 입이 심심하다고 하면 먹을 걸 갖다가 바쳤다.

영희가 대장이었다.

숙희는 영희가 시키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영희가 변덕을 부렸다.

소년을 놀이에 당최 끼워주질 않았던 것이다.

소년은 따로 숙희를 찾아가 같이 놀아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나 숙희는 영희 알면 큰일 난다고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 했다.

짧은 여름 소년의 로맨스는 그냥 그렇게 끝이 났다.

소년은 마음의 문을 닫았다.

다시 예전 생활로 돌아가 엄마 뒤를 쫓아다니며 나물을 캐거나 심심하면 나무에 올라가 영희와 숙희가 노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기만했다. 

티브이도 없던 시절이었다.

소년은 또래 집단에서 이뤄질 수 있는 자연스럽게 사람사귀는 방법을 터득도 못하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야 겨우 사람들이 제대로 모여 사는 동네로 이사를 갈 수 있었다.

                               2

소년이 이사를 간 곳은 수도권의 한 시골마을이었다.

그 마을 입구엔 커다란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느티나무 가지 여기저기엔 새끼줄이 매달려있었고 색동 옷 쪼가리 같은 것을 색깔별로 잘게

썰어서 그 새끼줄에 끼워놓았었던 것으로 보아 그것은 성황당이 아니었나싶다.

그리고 지나다닌 누군가가 소원을 빌었었던 것으로 보이는 크고 작은 돌탑들이 나무 밑둥 여러 곳에 뾰족하게 자리잡고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샤머니즘적인 의식이 아직도 남아있어서 그 느티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삼았고 그 나무가 해를 입는다거나하면 마을에 불길한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 

멋모르는 아이들에겐 그 느티나무가 놀이터였다.

나무그늘은 아이들에게 시원한 휴식터를 제공했고 눈치껏 나무위에도 올라가고 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아이가 그 나무에 올라갔다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다싶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 느티나무는 어른 셋이 팔을 둘러야 겨우 손을 맞잡을 수 있을 정도로 밑둥이 아주 굵었는데 위로 얼마 올라가지 않아서 가지가 벌려졌고 그 사이엔 시꺼멓게 힘몰된 부분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미 수명이 다한 고목이었던 것 같은데 바로 그 파인 부분에서 한 아이가 또아리를 틀고있는 커다란 뱀을 보았던 것이다.

그 느티나무는 언제부턴지 모르게 그렇게 고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나무에 대해서 좀 안다는 사람이 그 느티나무를 살리기위해 영양제도 놓아주고 무당을 불러 굿도 해보았지만 그 나무를 살리진 못했다.

마을 사람들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미신을 확신이라도 시켜주듯 마을에 사건이 하나 터졌다.

걔네 집은 짝귀네로 통했다.

딸만 셋에 아들이 한명 있던 집인데 바로 그 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한 쪽 귀가 뒤틀려 귓구멍이 막혀있었다.

아이들은 늘 그렇듯 선악의 구분이 없어 그를 짝귀라고 부르는데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짝귀의 어머니는 두문불출해서 좀처럼 얼굴보기가 힘들었는데 폣병이 걸렸다고도 하고 정신이 온전칠 못하다고도 했다.

소년네가 그 동네에 이사간지 얼마 안됐을 때의 이야기다.

마을 사람들에 대해 제대로 익히지도 못했을 때의 일이었는데 바로 그 짝귀의 아버지가 목을 매서 죽은 것을 아침에 빨래하러 가던 순이 엄마가 발견한 것이다.

냇가 양편엔 오리나무 밤나무 그리고 작은 가지들이 축 늘어진 정확히는 이름을 모르는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그 축 늘어진 나무는 가지를 꺾어서 훑어보면 껍질이 쉽게 벗겨졌는데 그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이들은 그 나무를 말자지 나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나무에 짝귀 아버지가 목을 맨 것이다.

파출소에 신고를 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고 시체를 수습하였지만 그 사람이 왜 죽었는지 그 원인을 규명하진 못했다.

다만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어볼 때 역시 그 느티나무가 죽으면서 짝귀네 아버지를 데려갔다고 믿는 게 제일 합당할 것 같았다.

소년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아이들과 제대로 어울리질 못했다.

그 동네도 또래 아이들이 적었고 학교에서도 마을 단위로 어울리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운동장에서 놀 때도 마을 대항 공차기가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작은 이방인을 늘 경계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소년은 주로 만화책을 보면서 초등학교를 거의 보냈다.

소년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쯤이었던 것 같다.

그 느티나무가 있었던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할머니 한분이 살고있었는데 그 사건(짝귀 아버지의 자살)이 잊혀져갈 무렵 그 할머니집으로 도회지풍의 젊은 미망인 한 분이 이사를 왔다.

바로 그 할머니의 딸이었다.

그리고 그 미망인에겐 딸이 한명 있었다.

할머니는 그 외손녀를 아주 이뻐했다.

소년보다는 한 살이 더 많았는데 그때 그녀는 중학교 1학년이었고 이사는 왔어도 학교는 그대로 전에 다니던 서울 학교로 통학을 했다. 

                         3

천마산 계곡에서부터 비롯된 물줄기는 작은 내가 곳곳에서 흘러들어 큰 내를 만들어 가다가 결국은 한강의 한 지류를 형성하게 되는데 마을사람들은 그것을 큰개울이라고 불렀다. 

여름에 장마가 지고 나면 물이 불어 아이들은 하루 온 종일 그 큰개울에서 멱을 감거나 낚시와 어항 또는 반도등으로 물고기를 잡았다.

조금 더 스릴까지 가미된 고급놀이는 물안경을 끼고 작살을 만들어 물속 깊이 숨어있는 메기를 잡는 일이었고 가끔 서울서 내려온 어른들은 투망이나 쵸크를 이용해서 큰 물고기를 잡아 올려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소년은 용돈을 모아 어항 두개를 사들여 한적한 곳에 자릴잡고 온종일 어항에 고기가 들어가길 기다리며 외롭게 시간을 보내곤했다. 

여름의 기다란 해가 조금은 생기를 잃은 오후 시간이었다.

미류나무가 심어진 둑방길을 따라 한 소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소녀는 반팔 티셔츠에 짧은 청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작은 동네라 얼굴은 이미 서로 알고있었다.

수줍음 많은 소년은 괜히 가슴이 뛰어서 그녀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잡은 물고기만 바보처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소녀는 그냥 지나가지 않고 소년 뒤에 그대로 멈춰 서있었다.

감히 뒤를 돌아다 볼 생각도 못하고 소년은 더욱 불안해졌다.

잠시 후 맑은 음성의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고기 많이 잡았니?"

뒤도 안 돌아보고 소년이 대답했다.

"응!...조금..."

"한번 구경해도 돼?"

소년은 말없이 잡은 고기를 그릇째 꺼내 소녀 쪽으로 들이밀었다.

"와~ 많이 잡았네!...디게 이쁘다.

이거 몇마리만 나줄래?"

"뭐하게?"

"집에서 한번 키워볼려고...."

"안돼!...이건 성질이 급해서 금방 죽어!"

"에이~ 그럼 안되겠네!

너 내일도 오니?"

"응!, 매일. "

"우리 집은 저기 보이는 저 집이야!"

"나도 알아, 얼마전에 이사왔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소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 친구할래?"

"응?"

소년은 심장이 뛰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럼, 그렇게 알고 난 갈께!"

소녀는 기분이 좋은지 지그재그로 깡총깡총 뛰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소년은 다음 날부터 딴 때보다 더 일찍 어항을 놓으러 예의 그 자리로 나왔다.

잘 씻지도 않던 소년은 매일 목욕을 하고 머리도 감고 옷도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소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소년은 매일같이 소녀가 오던 뚝방 길을 쳐다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어항에 고기가 들어가도 별로 신명도 나지 않았다.

                                   4

가끔 소년이 물가에 어항을 놓으러 가지 않는 날이 있었다.

그날은 아침 일찍부터 쏘다니며 고철이나 재활용품을 수집하러 다녔다.

어느날은 산속 깊이 들어가 바위 틈에 박혀있는 이중(총알)을 빼오기도 했다.

그 지역은 6.25당시 중요한 거점으로 인식되어 처절한 전쟁터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운이 좋은 어떤 날은 땅 속에 얕게 묻힌 탄두가 그대로 들어있는 탄피까지 수거할 때도 있었다.

전리품을 비밀장소에 쌓아놓고 소년은 흐뭇한 미소를 짓곤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아침에 까치가 요란하게 우는 날이면 늘 반가운 손님이 왔다.

소년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엿장수였다.

아니, 엿장수가 가지고 다니는 만화책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보유하고 있던 만화책을 엿장수와 교환하려면 빈병 몇개만 주면 되었지만 그렇지않고 아예 만화책을 사버리려면 큰 댓가를 치뤄야했다.

갖은 노고를 마다않고 소년이 고철이나 빈병을 모으러 다닌 것은 다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소년에게 만화책은 제법 많이 모여있었다.

그러나 엿장수가 매일 오는 것도 아니고 만화책도 파본이나 낱권으로 되어있는 경우가 많아 대개는 만족스럽지 못했기때문에 소년은 머리를 써서 어느날 돈 안 들이고 만화책을 바꿔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무조건 만화책을 한 보따리 옆구리에 끼고 이동네 저동네 다니다보면 집에 만화책을 보유하고 있던 사람들이 알아서 교환조건을 제시하곤했다.

나중에는 소년이 마을 입구에 나타나기만 해도 소문이 퍼져서 저마다 앞다투어 뛰어나와 환대를 해주었다. 

그 날 소년은 느티나무집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집은 기역자형 집에 초가를 걷어내고 그 위에 기와를 올렸으며 갈라진 흙벽 위엔 얇게 시멘트 미장을 하였으나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집 전체가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어져있었다.

"저 안에 그 소녀가 있을텐데...."

소년은 생뚱맞게 한참 동안 그 집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비록 다른 맘이 있어 그 집 근처를 의도적으로 지나다녔지만,..... 혹시 그 소녀가 집 밖으로 나오게 되면 우연을 가장해서 말을 붙여볼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기위해.....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소년은 만화책 물물교환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가지고 있어 남이 봐도 그렇게 이상하진 않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렇게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가던 어느날이었다.

그 날도 별 기대없이 소녀의 집을 지나쳐가려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면서 화려한 외출복을 입은 젊은 미망인이 집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소녀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바로 그 뒤에 배웅을 하기위해 그 소녀도 따라나왔다.

"어머~ 너......

여긴 어떻게?"

소년은 말없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만화책을 눈으로 가르켰다.

"얘는 누구니?"

"응!....엄마...내 친구!"

"안녕하세요?"

"응, 그래."

소녀의 엄마가 웃으며 대답했다.

소년은 기뻤다.

(아~ 나를 진짜로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그래...그럼 놀다 가거라!"

"예...."

"안녕히 다녀오세요! 엄마~

얘!~여기까지 왔는데 우리집에서 놀다갈래?"

소녀는 소년을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소년은 왜 한번도 자신을 만나러 와주지 않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녀의 이름은 희경이었다.

방바닥에 앨범이 한권 뒹굴고 있었다.소년이 봐도 되냐고했더니 소녀가 그러라고했다.

앨범은 교복을 입고 찍은 소녀의 갖가지 포즈가 담겨있었다.

여지껏 소년이 보아온 여자애들 중에서 소녀가 제일 이쁘다는 생각을 했다.

" 나... 사진 한장만 줄래?"

"사진은 뭐하게?"

"그냥 갖고 있을려고....그대신 내가 아끼는 레코드판 하나 줄께!

비록 빽판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폴 앵카의 크레이지 러브도 거기 들어있어!"

"응, 알았어!

내가 음료수 갖고 올테니까 넌 사진 고르고 있어..."  

그렇게 해서 얻어진 소녀의 사진은 소년이 성장해서 아주 늦게까지 빛이 바래도록 소년의 수첩에 오래도록 보물처럼 간직되었다.

                                  5

큰 사건없이 마침내 소년도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그 동네엔 중학교가 없었다.

그래서 4키로미터나 떨어져있는 타 지역으로 통학을 하게되었다.

교통수단이래야 한시간 꼴로 버스와 기차가 다녔으나 기차역은 멀고 버스는 항상 만원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버스비를 들고 매점으로 우루루 몰려가 저마다 군것질할 걸 사들고 삼삼오오 끼리끼리 모여서 걸어서 통학하는 방법을 택하곤했다.

그러나 소년은 경우가 좀 달랐다.

소년의 동네를 기점으로 출발한 버스는 소년이 다니는 학교를 경유하여 서울까지 오고갔는데 그 버스는 소녀에게도 마찬가지로 통학수단이었던 것이다.

운이 좋은 날은 버스안에서 소녀를 만날 수도 있는데 그 기회를 소년은 결코 놓치고싶지 않았다.

아이들은 멋도 모르고 소년을 놀려댔다.

"이 자식은 말이야!

낭만이 없어~낭만이,하드 하나씩 빨아먹으며 걸어다니면 얼마나 재밌는 줄 너 알어?"

그러면서 살구 서리하다가 주인한테 들켜서 꽁지가 빠지게 줄행랑을 치거나 중간 마을에 들려서 신나게 놀다온 무용담등을 소년에게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소년은 고독했다.

그 고독을 소년은 바둑과 공부에 쏟아부었다.

바둑을 제법 잘 둬 인근 지역에 애 어른 할 것 없이 그 소년의 호적수가 모두 사라졌을 정도였다.

5급 정도의 실력으로 그리 잘 두는 편은 아니었지만 시골이라 실력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그러다보니 소년은 바둑에도 이내 시큰둥해졌다.

소년은 취미로 공부를 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시험 땐 집에 일찍 오면 붙들려서 어쩔 수 없이 집안 농삿일을 거들어줘야 하므로 그 기간엔 교실에 남아서 시험공부를 하다가 늦게야 귀가했다.

문제는 교실에 남아서 공부하는 남학생은 소년 한 명인데 비해 여학생들은 항상 예닐곱명이나 되었다는 점이다.

이럴 때 소년은 항상 바보가 된 기분을 느꼈다.

한번은 짖궂은 여학생 한 명이 다짜고짜 다가와서 소년이 암기하던 노트를 확 낚아채서 밖으로 달아난 적이 있었다.

돌려달라고 아무리 애원을 해봤지만 그녀는 막무가내로 자신을 잡으면 주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부반장 여학생이 중재하여 간신히 노트를 돌려받았지만 소년은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여자들에 대한 적개심이 생겼다.  

그러나 꾹 참고 공부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 소년은 반에서 항상 1~2등을 다퉜다.

소년의 즐거움은 가끔씩 만나는 소녀와 말을 섞을 때와 그녀가 준 사진을 들여다보며 고독감을 잊을 때 뿐이었다.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소년은 왕따를 당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췄으나 그나마 공부를 잘 해 누구든 소년을 함부로 배척하진 못했다.

싸움을 잘 하거나 공부를 잘 하면 누구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

소년은 자기자신이 싫어질 때가 많았다.

인간세계에 도전과 응전이란 당연히 존재하는것인데 무조건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고 그의 뜻을 따르다보면 그건 착한 훈장을 받을 일이 아니라 비겁하고 비굴하고 바보가 되는 길이란 것을 소년은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됐다.  

그러던 어느 점심시간이었다.

밖에서 놀다가 들어온 평소에 장난이 좀 심한 놈 하나가 작은 뱀을 한마리 들고들어와 교실에 풀어놓았다.

여학생들은 '꺅꺅~' 하며 소리를 질러대느라고 교실이 떠나갈 것 같았고 남학생들은 낄낄거렸다.

소년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병신들~"

시선이 모두 소년에게 집중되고 일시 조용해진 틈을 타 소년이 뚜벅뚜벅 걸어가서 뱀을 손으로 움켜쥐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리고 며칠후 과학 실험실 앞에서 선생님이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며 반아이들 모두 여기저기 서성 거리고 있을 때였다.

요즘말로 하면 짱이라고 불리는 애가 소년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툭치며 시비를 걸었다.

그 놈은 아이들 괴롭히는 걸 재미로 알고 사는 놈이었는데 아마도 뱀사건 때문에 소년에게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소년은 예전의 그 소년이 아니었다.

소년이 반발하며 욕을 퍼부었다.

반 아이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뭐라구?...이자식이..."

놈이 쪽팔렸는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권투 자세를 취하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놈은 소년의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했다.

소년은 발차기 명수였다.

주먹이 소년의 몸에 닿기도 전에 놈은 소년이 내지른 발에 번번히 나가떨어졌다.

아이들 모두 소년의 편을 들었다.

이후 놈의 권위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땅바닥에 곤두박질쳐졌다.

그러한 행동은 아마도 사춘기와 겹쳐 현실에서 뿜어져오는 불만과 불안감을 잊기위한 돌파구의 한 방편이었을 것이며 또 한편으론  언제 어디서나 비겁해지거나 초라해지지않는 당당함을 키워야한다는 무의식적 자아의 발로였을 것이다.

그래야 막연하게나마 나중에라도 어떤 한계상황이 도래했을 때 그 소녀에게 비굴하지 않고 자격지심도 떨쳐버리고 떳떳하게 서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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