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가을은 ☆


           깔끄러운 모래 위를 뜨겁게 핥던 열정도
           지금은 단풍의 여운으로 사위어 가는 계절,
           영혼이 홀로 산정(山頂)을 향해 떠나는 가을입니다.
           한 보퉁이의 갈망이 펼쳐져 방황했던 하늘도
           이제는 산정 위에 맑게 씻기워져야만 하는 계절입니다.

           과거의 씨앗은 잎으로 꽃으로 틔운 다음이기에
           지금은 새로운 아픔으로 다독여 묻을 시간,
           내면으로 뿌리를 간직할 시간과 더불어
           모든 만남과 뒤따르는 이별을 감추이고
           이제는 바람의 계절이 되었습니다.

           바람이 우리들의 영혼을 불어가며
           과거의 대지 위에 새로운 오솔길을 그려놓아
           지난 궤적을 되밟고 되밟는 걸음의 사색으로
           어제의 아픔을 잊고 그리하여 새로운 아픔을 만들어 가는
           오늘은 신을 회의하는 고뇌의 시간입니다.

           神은 의문이 아니라 확고한 믿음이며
           믿음이 없는 모든 사람은 고뇌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일종의 자기 기만을 진실의 증거로 삼는데 반해
           자기를 기만하지 않으려는 모든 사람은, 타인과 더불어
           스스로에게 진실의 의문을 끊임없이 던지기 때문입니다.

           왜? 왜? 왜?라는 물음의 화살표가
           우리들의 내면을 과녁으로 겨누어 당겨지는 순간
           바람결은 너무나도 세차게 불어
           만점을 맞추기위해 영점을 겨누어야만 하는 때.
           확고했던 모든 신념은 흔들리는 시야에 가리워지고 맙니다.

           목표로 대표되는 미래는 예정이 아니라 설정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지향은 시선에 있지 아니하고 목표에 있기 때문에       
           바람이 부는 계절에 우리들의 시선은
           확고하게 머물러야만 하는 위치를 찾지 못하고
           그리하여 시위를 당기는 우리들의 손을 떨리게 합니다.

           그러나 어제의 시간이 오늘의 시간과 같을 수없고
           아픔이라도 과거의 아픔이 현재의 그것일 수는 없듯이
           올해 가을은 지난 가을과는 다른 결실과 낙엽을 준비하고
           나의 새로운 시간의, 새로운 나의 새로운 의미의,
           긴긴 동면의 외투깃을 예고하는 사색의 가을입니다.

                                      1983.9.9. 새벽0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이경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