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遺書 ☆
 
                               - 둘하고 스물의 삶을 마름하며 -
 
     시작은 둘이 둘이 되던 해
     그리고 둘이 둘을 만났던 날
     그날로 미루어 오늘은 아홉이 둘이 되는 날.
     바로 구세주 탄생을 원점으로
     이역 어느 외양간에서 소가 울었듯이
     동심원의 빛은 확산에 의해 사위고
     초점은 암흑의 밤.
     그 진원지에는 하얀 눈이 내려
     들려오는 소녀들의 웃음 소리를 귓구멍으로 틀어 막아야만 하는
     대문이 떨어진 철로 변의 부실 건물은
     성탄의 종소리에 흔들리고 있는 풍경.
  
     이 초라한 배경 안에서 나는
     바람막이 유리창도 깨어져버린 방 귀퉁이
     몇 년을 써오던 책상, 왼쪽 손 닿는 둘째 서랍에
     질서 없이 넣어 놓았던 소품들을 쓸어내고
     한 장 한 장 추억을 접어 넣었던 그날부터
     남 몰래 잠궈두곤 했던 마음의 금고를 열어
     오늘
     둘이 둘을 만났던 그날로부터
     아홉이 둘이 되는 이 탄생의 날에
     한 폭 한 폭 지나가는 투영을 새기며
     그래 어느날 지하 상가에 멈춰 서서 바다의 풍경화를 감상했듯이
     발길 멈추고 되돌아 보는 지나온 자욱 같은
     첫 눈 위에 찍힌 궤적 같은
     아흔 아흐레의 언어를 읽었다.
 
     한 잎 한 잎 떨구어 불길 속에서 쓰여진
     빨간 서명의 별이 불꽃을 타고 빛으로 되어
     이제 내 손에는 별이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원래 별이라 빛으로 돌이키려니
     나머지 별 하나를 최후로 저 불꽃 속에 던져넣기 앞서
     마지막 이별을 너에게 주고자 하여
     이렇듯 책상 머리에 앉아
     여백을 빌어 스물 세 개의 타종을 동그라미치다.
 

     우리들의 만남은 무엇이냐.
     청자 다방, 거목 다방, 학 다방, 꽃샘 다방의 커피 맛이냐, 아니면
     민 화랑에 걸린 결혼 예복의 구태의연한 걸음의 환상이냐, 또는
     말끔히 비워진 맥주잔의 홍조 띤 독백이냐, 그리하여
     도망자를 빗대어 겨눈 간접 화법의 칼날이 되거나
     계절의 추위를 토해내는 냉소 띤 가치관의 형이상학이 되었더냐.
 
     지난일 아무렇거나 이제는 차원을 바꾸어 보자.
     손, 손 하지마는 손이 무어냐.
     하루 세끼 밥 숟가락 들듯이 습관적으로 쓰는 것만이
     유일의 사용법이냐.
     그 정도의 의미로 만족한다면 나야 꺼릴 것이 무어냐.
     비록 유희에 지나지 않더라도
     손수건이 손목을 묶었던 것을 잊었느냐.
     하나를 준다는 것은 모든 것을 주기위한 서약으로써만
     그대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었더냐.
     이것이 나의 형이하학이니 왜 사냐 하면 웃어라.
 
     이리하여 의미를 가지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나의 고민이 되었으니
     의미는 사색을 낳고 사색은 슬픈 갈등 속에서 두고두고 혼미만 거듭하여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이상이기는 포기하였으되 현실은 의문으로 남다.
 
      「감정과 이성이 대립하지 않는 이 고민은 무엇이냐.
        어찌하여 감정이 나누이고 이성 또한 나뉘느냐.
        감정과 이성의 상호모순을 벗어난 스스로의 분열은 무엇이냐.」 
 
     과거의 철학은 나에게 침묵한다.
     왜냐하면 철학은 개인적 고뇌의 소산으로 그 자신에게만 해결을 주는 것이기에
     나는 보편성을 상실한 정신의 혼란을 겪어왔다.
     시월의 마지막 그날로부터 앞으로도 계속될...... 
 
     나에게는 순수와 불순의 어휘가 서로 대립하되 동시에 너를 멀리한다.
     나는 어느쪽 하나를 확실히 없애고 싶었다.
     내가 순수하다면 너를 만나는데 문제는 없다, 이것이 나의 이상이다.
     내가 불순하다면 이 역시 너를 만나는데 문제는 없다, 이것은 나의 이기이다.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이 순수와 불순의 혼합물, 이를 무어라 하랴.
     보편적 심리 언어는 가해망상의 정신 분열이라고 부르겠지만
     이를 나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불량 조합이라 명명한다.
 
     그래 우리들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옳은지,
     이런 차원 이상적인 것은 제쳐두고 라도 일상 행위의 의미조차.
     그렇다고 명확한 인식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들의 행위를 시간 묶어두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우리들의 양심은 잘못의 극소화로 결정짓다.
     비록 극소가 최소가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들이 헤어져 만났던 시간은 냉정하게 흘러
     나를 못박은 듯이 제자리에 꽁꽁 얼려 놓았으되
     너의 냉정함을 깨어 타에 눈 뜨게 하다.
     건널목에서 상처 난 발목을 어루만지는 것이 그렇고
     남들이 전부들은 그러나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나야 모르는 척 해야만 했었던,
     침착을 잃어 어지러운 너의 독백이 그렇고
     껌팔이에 대한 배려가 또한 그렇다.
 
     그러나 이런 것 모두 배경에 지나지 않으니
     만원 택시에 지친 너의 각선(脚線)도
     외래 율동에 초라해진 나의 몰골도
     모두 의미 없이 배경에 불과하다.
     중요하거니 서로에게 부여하는 가치였으나
     내가 너에게 부여할 수 있는 가치의 진정한 의미를 나는 확신하지 못했으며
     너는 나에게 해답을 알 수 없는 문제를 내어 놓았다.
 
     문제의 답은 O 아니면 X 밖에 없다.
     어중간한 △는 문제에 대한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O를 위해서는 나의 확실한 인식과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는 가치가 필요했다.
     즉 자신에게 O를 칠 수 있어야만 인생의 문제는 풀 수 있는 것이라.
     싫었고, 고통스러웠지만 나는 X를 선택했고
     그 답은 정확히 틀렸다.
     그러나 우리 인생을 길게 보면 그것만이 유일하게 옳을지도 모른다.
     헤어짐을 결론으로 설정하는 만남은 하루라도 짧게 하는 것이 책임 있는 태도이며
     네 말대로 무책임해서는 안 되는 것이 남자니까.
 
     그렇지만 시험지가 이미 거두어 졌다고 해서
     틀린 것을 안타까워 하지 않는 응시자가 없듯이
     나의 응시는 끊임없이 너를 향했다.
     그리고 이것이 운명이 아닐까 전율해야만 했던
     너의 말없는 책을......
     너는 책을 통해 말하려 했을지라도 
     나는 듣지 못했다, 똑똑히는.
     왜냐하면 만인을 대상으로 하는 말은
     나를 후려치는 한마디의 욕지거리보다도 불분명 하니까.
 
     물음이 없을 때 답은 없나니
     답이 없다면 틀리지도 않을 것을 구태여 찾아
     문제를 제시한 사람은 결론이 무엇이라도 그것에 승복해야 하는 법.
     아무도 원망을 말지니, 요건 나에게 하는 말이라.
 

     이렇게 하여 마지막 날의 밤늦게 우리들의 만남은 사실적으로 끝났지만
     우리들의 헤어짐은 끝나지 않았다.
     헤어진 너는 실물보다도 더 크게 나를 자리잡아
     실존 영역을 확장해서 헤어짐의 존재로 나를 장악하다.
     너를 만난 추석의 보름달로부터 너는 나를 소유하고
     나는 단 하루도 너를 벗어나 본적이 없으니
     그때부터 너는 하나가 아닌 둘이,
     내 영혼의 내면을 끝없이 달려가는 평행선 같은 둘이 되었다.
 
     여기 이야기가 지금까지의 이야기이고
     또한 지금의 이야기다.
     그러나 앞으로는 결코 평행선을 바라지 않는다.
     그래 이제 나를 모사하여, 즉 내 속의 너를 꺼내어
     원 임자인 너에게 되돌려 주노니
     너는 어설픈 나그네인 나보다도 스스로의 씨앗을 소중히 키우리라.
     그리하여 내가 그린 꽃나무보다 더욱 찬란한 빛을 안으리니......
 
     자 이제 시 속에 또 한편의 시를 넣자, 제목도 없는
     어차피 시시한 언어, 어떻게 쓰든 상관말고 들으려무나.
 
      「어느날 그대는 날렵하게 내게서 달아났다.
        영원한 평행선이기를 거절하고
        내가 원했던 긴 시간의 친구이기를 고개 저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평행선이 아니나
        평행이 아닌 두 선은 반드시 한 번 만나는 것
        우리는 언젠가 만날 수 밖에 없으리라.
 
        아니 하나 잊은 게 있으니
        평면을 달리하는 일만은 없기를
        입으로는 차원을 논했다 하나
        이 땅은 너무나도 좁은 관계로......」
 
     안녕이라 말할까! 사랑하지 못했던 첫 만남이여, 그대!
     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다지만
     어떡하니, 나의 마음 속에 사랑이란 추상으로 존재치 않는 것을.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 이건 정말 비극이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이니까.
     이리하여 이것이 곧 나의 죽음이 된다.
     그러나 나는 원래 별이라 빛으로 돌이키려니...... 
                1982년 12월 25일 0시에 작성하다.
                                   1983.8.14(음 7.6) 새벽 4시   

     유서(遺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