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로봇] - 비주얼과 착상에 못미치는 어정쩡한 착지  2004-08-03

▲ 영화 [아이, 로봇]

올 여름 영화 성수기의 특징은 한국 영화의 빈곤과 헐리우드의 약진이 두드러집니다. 한국영화는 그렇고 그런 로맨틱 코미디나 공포물들 일색인데 반해 최근 2-3년동안 별로 맥을 못추었던 헐리우드가 다양하고 풍성한 메뉴로 관객들을 유혹합니다. 저같은 경우에도 주말에 영화를 보러가려고 할때 가장 먼저 선택하는 기준은 아이와 함께 볼 수 있는 것을 택하게 되는데, 주5일제의 실시로 인한 관객층의 변화에 맞춰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변신이 필요한 때인것 같습니다.

오늘은 SF 영화로 로봇과 인간의 관계를 다룬 [아이, 로봇]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원작

멀지않은 미래은 2035년, 인간은 지능을 갖춘 로봇에게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편의를 제공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리에서부터 애완견 산책시키기 같은 집안일, 쓰레기 수거와 위험한 공사장 일 등 사회적 영역까지... 이런 로봇들은 절대 인간에게 대항하지 못하게 하는 '로봇 3원칙'아래 만들어져 대량으로 공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로봇의 창시자이자 개발자인 래닝 박사가 숨진채 발견되고, 래닝 박사는 미리 설정해 놓은 프로그램으로 로봇을 심하게 불신하는 주인공인 스프너(윌 스미스) 형사에게 연락을 취합니다.

새로 업그레이드된 로봇 출시를 앞두고 있는 로봇 제작 회사측은 래닝 박사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짓고 사건을 빨리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이에 맞서 스프너 형사는 동물적인 육감으로 래닝 박사의 연구실을 조사하는데, 절대 인간에 맞서는 일이 없어야할 로봇 하나(써니)가 그를 공격하고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스프너 형사는 로봇 심리학자인 캘빈 박사(브리짓 모나한)의 도움으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 들어가면서 놀랄 만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공적인 볼거리, 중반이후 떨어지는 짜임새

인간이 만든 창조물인 로봇이 인간이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자아나 정체성을 갖게 되면서 자신의 실존적 고민이나 인간과의 관계 설정 문제는 새로운 소재가 아닙니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부터 리들리 스콧 감독의 걸작 [블레이드 러너]나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등에서 그 고민에 대한 질문을 던져오기 시작했는데, [크로우]나 [다크시티]같은 영화에서 음울한 색채의 미래 도시를 그려냈던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은 SF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의 원작을 비교적 깔끔하고 정교하게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모습이나 도로를 질주하는 진화된 자동차, 거대한 건물들로 둘러싸인 도시 등을 훌륭하게 묘사합니다. 특히 로봇들이 주인공을 공격하는 장면의 긴장과 비주얼은 SF 영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고 평가할만 합니다. 사건의 비밀을 파헤쳐가는 중반부까지는 미스테리 범죄물의 전형에 충실하면서 극적 긴장감을 꽤 높여줍니다. 스프너 형사의 과거, 래닝 박사와의 인연, 이상한 로봇 '써니'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자체적으로 진화한 로봇들이 반란을 일으켜 인간들을 습격하고 공격하는 후반부에서는 짜임새가 다소 떨어집니다.

[맨 인 블랙]등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에서 쿨한 젊은 흑인 역으로 이름값을 높여온 윌 스미스는 이 영화에서는 기존 배역의 성격에서 탈피해 고뇌하고 의심하는 미래의 형사 역할에 도전하지만 그다지 성공적으로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헐리웃 영화에서 흑인 배우들이 맡아온 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 - 항상 떠벌이고, 즐겁게 살고 등등 -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주인공보다 더 관심이 가는 인물은 가상의 캐릭터인 로봇 '써니'입니다. 경찰에 잡혀와서도 '나는 도대체 누구냐'는 질문을 해대고 인간과 대립하다가 결국 자신과 같은 종족인 로봇들에 맞서 인간을 도우는 '써니'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점점 더 매력을 더하게 됩니다.

메시지의 빈곤

다른 SF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테크놀로지에 대한 맹신과 편리함만 추구하는 인간의 이기심에 경고를 주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 힘은 그리 크게 가슴을 울리지는 않습니다. 철학적, 존재론적 물음과 고민에 대해서 그다지 깊이있게 파고 들어가지도 않고, 결국 오락과 철학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어정쩡한 자세로 착지했다고나 할까요.

슈렉2 - 돌아온 초록 괴물  2004-06-18

▲ 애니메이션 [슈렉2]

3년만에 돌아온 초록 괴물

 애니메이션 [슈렉]은 3년전 여름 미국 흥행성적 1위를 기록하고, 칸 영화제 본선 진출, 아카데미 상 수상등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한꺼번에 받았습니다.  어릴적부터 익숙한 동화의 세계관을 뒤틀고 꼬집고 풍자하는 맛과 생생한 캐릭터, 사실적인 컴퓨터 그래픽 등으로 애니메이션 팬들은 신선하고 유쾌한 충격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슈렉의 속편이 한층 다양해진 등장 인물과 업그레이드된 풍자와 패러디로 무장한채 우리곁을 다시 찾았습니다.

 전편에서 '행복하게 오래 오래 잘 살았습니다'의 예쁜 동화책을 부욱 찢어서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장면으로 시작했듯이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요정 대모의 아들인 차밍 왕자가 피오나 공주를 찾아가 키스를 하고 결혼하는 것이지만 슈렉이 먼저 데려가면서 그들의 계획은 틀어지게 됩니다. 슈렉과 피오나 부부는 달콤한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슈렉의 보금자리에서 행복한 신혼생활을 시작하려 합니다. 그러나 피오나의 부모인 '겁나게 먼 왕국(far far away kingdom)'왕과 왕비로부터 왕국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장을 받습니다.

 가기 싫어하는 슈렉을 설득시켜 왕국에 도착하지만 멋진 사윗감을 기대했던 왕은 물론 모든 사람들은 슈렉의 흉칙한 몰골을 보고 경악하게 됩니다. 오직 한 사람, 피오나의 어머니인 왕비만이 딸을 이해하고 슈렉을 사윗감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요정 대모의 계획에 따라 꼭두각시에 불과한 해롤드 왕은 슈렉을 제거하고 차밍 왕자와 결혼시키기 위해 거금을 주고 자객을 고용합니다. 슈렉은 막강한 힘을 가진 요정 대모의 이런 음모를 물리칠 수 있을까요?

헐리우드와 이미지에 대한 조롱

 전편에서 디즈니로 대표되는 동화의 허구성을 깨뜨리고 조롱한데 이어 이번에는 헐리우드와 베버리 힐즈로 대표되는 이미지와 상품의 왕국을 조롱합니다. 또 요정 대모와 차밍왕자등 고전 동화에서 멋진 인물로 등장했던 이미지에 대해서도 뒤집어 보기를 시도합니다. 슈렉이 요정 대모를 찾아가 담판을 짓는 과정에서 요정 대모는 산더미같은 동화책들을 하나 하나 뽑아가며 자신의 세계관을 슈렉에게 강요하기도 합니다.

 이밖에 헐리우드 유명 영화의 명 장면들을 곳곳에서 살짝 살짝 패러디합니다. 줄거리와는 별로 상관없는 대단하지 않은 장면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영화를 좋아해온 어른 관객들에게 양념같은 눈요기거리로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아 더욱 맛이 새롭습니다. 슈렉과 피오나 부부의 신혼여행 장면에서는 대사없이 노래만 흐르는데 몇가지 기발한 상황들 때문에 흐뭇한 웃음이 저절로 나오더군요.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는 즐거움

[슈렉2]에는 또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숏다리 가분수인 파콰드 영주를 대신해 '얼짱' 차밍 왕자가 나와 동화속 왕자에 대한 환상을 깨게 만듭니다. 또 하나의 인물은 해롤드 왕이 고용한 자객인 '장화신은 고양이'로 수다쟁이 동키가 비교적 점잖아져서 생기는 공백을 메꾸고도 남습니다. 현학적이고 낭만적인 척하는 우스꽝스러운 스페인식 억양으로 생동감있는 연기를 선보이는데 목소리 연기는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맡았습니다.  특히 영화에서 두 번 선보이는 '불쌍하면서도 한없이 귀여워보이는 표정짓기'는 압권입니다. 점잖아지기는 했지만 동키의 수다도 여전합니다. 에디 머피가 목소리를 연기했는데 입모양과 얼굴 표정의 묘사가 생생해서 거꾸로 에디 머피가 전생에 동키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해봤습니다. 피노키오를 비롯한 동화속 캐릭터들도 여전히 잠깐씩 등장하면서 감초 역할을 합니다.

외모와 가진 것만으로 또 환상적인 이미지로 승부하는 헐리우드를 풍자하고 요정 대모가 사실은 왕국에 마약 공급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등의 설정을 통해 진실과 거짓, 당연시해온 것들에 대한 낯설게 보기를 시도도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몸짱과 얼짱 전성시대에서 '마음짱' '힘짱'인 슈렉과 피오나 공주가 참으로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다가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최소한 전편보다 못하다는 평가에서는 벗어난 것으로 보여집니다. 탄탄한 스토리와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등장인물들, 그리고 풍자정신이 어우러져 썩 훌륭한 애니메이션 속편으로 기록될 것으로 보입니다. 드림웍스의 카젠버그 회장은 앞으로 2년마다 슈렉3편과 4편을 계속 선보이겠다고 약속했는데 과연 앞으로의 행보는 어떨지 궁금해집니다.

▲ 영화 투모로우 한 장면

이 영화의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는 독일 출신으로 [유니버설 솔져], [스타게이트]등 다소 독특한 SF 영화로 헐리우드에 입성한 뒤, 1996년 외계인의 지구 침공에 맞서 싸우는 [인디펜던스 데이]로 세계적인 흥행감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미국 대통령까지 전투기를 직접 몰고 나가 외계인의 침공을 물리친다는 다소 유치한 만화같은 내용이었지만 백악관이 폭파당하고 뉴욕이 쑥대밭이 되는 사실적이고 충격적인 컴퓨터 그래픽 화면은 지구촌 관객들을 열광시켰습니다. 같은 해에 개봉된 [단테스 피크], [볼케이노]등과 함께 이후 [딥임팩트], [아마겟돈]로 이어지는 헐리우드에 대형 재난 영화 붐을 일으키는데 시발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일본 괴수 만화에서 착안한 [고질라]역시 엄청난 특수효과로 평온했던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엉성한 스토리 전개에 식상한 관객들에게서 외면당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패트리어트:늪속의 여우]로 재기의 전기를 마련한 뒤 드디어 1억 달러가 넘는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쏟아부은 [투모로우]를 완성시켰습니다.

환경재앙, 아버지와 아들

기상학자인 홀 박사는 남극을 탐사하던 중 빙하가 녹아내리는 현상을 목격하고 기상 이변이 올 것을 감지합니다. 국제회의에서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녹아내리고 이것이 해류의 흐름을 바꿔 지구에 빙하기가 찾아올 수 있다고 경고하지만 정치인들은 이를 무시합니다. 하지만 뉴델리에 눈이 내리고, 도쿄 시내 한복판에 사과만한 우박이 떨어져 인명피해를 내는등 재앙의 징조들이 나타납니다.

며칠 뒤 끔찍한 토네이도가 LA 지역을 휩쓸어 도시 전체를 폐허로 만들어 버리고, 뉴욕에는 폭우끝에 거대한 해일이 몰아닥칩니다. 퀴즈 대회 참가 때문에 뉴욕에 머물던 홀 박사의 아들 샘은 친구들과 함께 도서관에 고립되고 홀 박사는 아들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얼음의 도시로 변한 뉴욕으로 떠납니다.

보여주기에만 충실

중반부까지 대충 줄거리라고 적어봤지만 네 다섯줄 밖에 되지 않는 지극히 간단한데서 볼 수 있듯이 이 영화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지구 곳곳의 기상 재앙은 실시간 뉴스 특파원들의 보도를 통해 보여주고 또 지구 전체 차원의 모습은 상공의 우주 정거장을 이용해 보여줍니다.

거대한 우박, 엄청난 토네이도의 광풍, 순식간에 얼어붙는 뉴욕 장면은 화려한 특수효과로 보는 이의 숨을 잠시 멋게할 정도입니다. 뉴욕 맨하탄을 해일이 덮치는 장면은 이미 혜성의 지구 충돌을 다룬 [딥 임팩트]에서 보여준 바 있지만 이 영화의 해일이 훨씬 더 사실적이고 충격적입니다. 그렇다보니 등장 인물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배우들이 연기하는 인간에게서 극적 긴장감이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자연은 원래 인간이 맞서 싸울 만한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자원의 무분별한 남용, 온실가스, 지구 온난화 같은 의미있는 환경 문제가 제기되기는 하지만 영화 스토리 전개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전락해버려 관객들에게 그다지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대사나 인물간의 관계가 아닌 특수효과를 이용한 스펙타클로 관객을 쥐락 펴락하는 감독의 재주만큼은 탁월하다는 생각입니다. 때문에 이 영화는 꼭 극장에 가서 보시기를 추천하는 바입니다.

에머리히의 전향?

한가지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인디펜던스 데이]에서 외계인의 침공에 맞서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서 고난을 물리치는 미국을 보여줌으로써 패권주의에 물든 미국인의 헛된 자존심을 치켜세워 주었던(비록 외계인의 공격에 백악관이 무참히 뽀개지는 장면이 있기는 했지만) 에머리히가 이번에는 환경보호론자의 입장에서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국제협약에 가입하지 않는 미국과 부시 행정부를 공격하는 메시지가 있다는 점입니다.

지구의 북반구가 추워지면서 따뜻한 남쪽으로 대피령을 내려 미국인들이 멕시코 국경에 모여들자 멕시코는 국경을 폐쇄하고, 미국 대통령의 남미의 모든 부채를 탕감해 준다는 조건으로 피난민을 받아준다는 설정은 현실의 기가 막힌 역전으로 약간은 허탈한 웃음이 나오게 만듭니다. 실제로 대선을 앞둔 미국 정가에서 이 영화가 정치적 논쟁에 휩쓸리고 있고 또 영화사로 하여금 미 행정부가 껄끄러워하는 지구 온난화니 온실 가스 같은 내용은 영화 홍보에서 모두 쏙 빼버리는 홍보 전략을 채택하게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이처럼 스펙타클의 탁월한 재능에 탄탄한 스토리가 합쳐진다면 반지의 제왕에 버금가는 걸작이 탄생할수도 있을텐데 하는 가정을 해보기도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신은 인간에게 모든 재능을 주지 않는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