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떡하실래요?"
아내가 출근하면서 다시한번 묻는다.
같은 말을 거듭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묻는다.

오늘은 아내의 학교 관악부가 정기연주회를 하는 날이다.
저녁7시부터 하는 모양인데 내가 참석해서 같이 음악 감상도 하고
은행나무 가로수 멋진 길을 같이 걷고 그러고 싶다는 것이다.
정장을 입어야할 자리인데 구미에 양복을 갖다 놓은 것이 한벌도 없다.
그렇다고 양복을 사 입을 필요까지는 없는 일이다.
부산 집 장농에는 철철이 입을 양복이 많이 있지 않은가.

"점퍼 입고 렌드로바 신고 가긴 좀 그렇는데...."

"밤인데 어때요. 그냥 오세요."

"그럼 그러지 뭐...."

그래서 처음으로 찾아간 구미문화예술회관.
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이다.
날씨가 잔뜩 흐려서 우산까지 하나 챙겨들었다.

아내가 담임을 맡은 반이 4학년7반인데
그반의 절반은 관악부단원이다.
연습이다 연주회다 수업에 빠지는 경우가 많아서
4학년의 관악부 단원을 한반에 몰아서 편성을 했다고 한다.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들이다보니 애착이 많이 가는 모양이다.

입구에서 손님들을 맞이하시는 교장, 교감선생님과 처음으로 인사를 드렸다.
시장을 비롯한 내외귀빈들도 많이 오셨다.
아내와 함께 자리에 가서 앉으니 어디서 보았는지
4학년7반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몰려온다.
나를 흘끔흘끔 보는 것이 우리 선생님 남편인 모양이야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 아이들과 함께 앉아 연주회 시작을 기다렸다.

정각에 하얀 단복을 입은 아이들이 각자의 악기를 들고 입장한다.
Jubile Royal (행진곡 쥬빌레 로얄)의 웅장한 팡파르로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이어서 Where Eagles Soar (독수리의 비상), Moon River가 이어지고
중간의 특별공연 차례가 되었다.

어머니합창단의 순서이다.
노래는 '코스모스를 노래함'과 '잊혀진 계절'이었다.
잊혀진 계절의 여성합창을 듣다보니
문득 몇년전의 저녁미사가 떠오른다.

10월의 마지막날 저녁미사인데 일요일인지 토요일 특전미사인지는 잘 모르겠다.
40대 신부님이 파견성가 대신 '잊혀진 계절'을 부르겠다고 했다.
가끔 그런 파격을 하시는 신부님이었는데  언젠가는 "사랑으로'를 파견성가에 대신했다.
그날이 마침 10월31일이었다.

 우... 우... 우....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어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잊을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우... 우... 우....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우... 우... 우....

천정이 높은 성당에 웅장하게 울려퍼지는 가요는 전혀 가요 같지가 않았다.
마음이 찡해지면서 갑자기 '잊혀진 계절'이 아니라 '잊혀진 사람'이 떠올랐다.
잊혀진 사람, 그사람은 다름 아닌 내 자신이었다.

수년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지인들을 멀리하고 지내온 나.
그들이 나를 잊고 내가 그들을 잊고....
난 그냥 그렇게 조용히 살고 싶었었다.
안으로만 돌돌 말아 조용히 침잠하는 고동처럼...

오늘 또 그 노래를 들으니
불현듯 잊혀진 사람들이 떠오른다.
친한 친구들이야 가끔 전화로 안부는 묻고 살지만
나와 인연을 맺었었던 사람들에게 너무 무심히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 사는 게 이게 아닌데....
쓸쓸한 표정을 짓는다고 달라질 것 없는 것을.
이룰 수 없는 꿈이라도 꿈이 있던 시절이 행복했었지.
시월은 이래서 시린 계절인가 보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귀가길에 아내와 함께 한 우산을 쓰고
손을 꼬옥 잡고 '잊혀진 계절'을 부르며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