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정답은 없다. 그럼에도 시인들은 정답을 찾으려고 발버둥 친다. 가물가물한 이미지의 옷자락을 붙들고 혈안으로 밤을 지새는가하면 마치 부처님 불알이라도 만진 양 사자후를 토하며 좌중에게 자신의 시를 설파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가가면 갈수록, 잡으면 잡을수록 더 멀어지는 세속의 사랑처럼, 이튿날 정신을 차렸다 싶으면 어느 새 한 발짝 물러서 있는 시를 발견하고 만다. 시가 객관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정답 없는 것이 어디 시뿐이랴. 사람살이가 그러하고 모든 존재의 이유가 또한 그러할진대 정답에 이르기 위한 치열한 문답의 전 과정이야말로 정답 없는 정답인 셈이다.
시를 생각하는 매 순간마다 시인은 절망한다. 절망하면서 거듭 태어난다. 그게 시의 힘이고 시인의 숙명이다. 시는 시인의 고뇌의 뇌수를 파먹고 사는 짐승이다. 마침내 고뇌가 다할 때, 시는 시인을 떠나겠지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시인이 숨쉬기를 멈추는 순간, 한 무리의 시가 완성됨을 목도한다. 시인의 생의 파란만장이 시에 보태질 때, 시는 비로소 하나의 면모를 얻게 되는 것이다. 시에 정답은 없다. 시인은 전면적으로, 전 존재의 매장량으로 묵묵히 나아갈 뿐이다.

이윤학의 시는 담백하고 명징하다. 범박하거나 가볍다는 얘기가 아니다. 일체의 수다와 습기가 제거된 그의 시는 드라이 하면서도 단단하다. 그의 시는, 섭씨 3,000도 이상의 고열로 구워낸 도자기 같은 시이다. 야구로 치면 그는 160킬로 대의 강속구를 뿌려대는 투수이며, 바둑으로 치면 치열한 기세 싸움 끝에 기어이 중앙으로 한 점 머리를 치밀고야 마는 끈기와 강수의 기사다. 그는 시에 있어서만큼은 기교나 타협을 싫어한다. 시시각각 싸움을 걸어오는 세상과 언제나 정면으로 맞설 뿐이다. 변명은 필요 없다. 네(시적 대상)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시는, 기교와 타협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승리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그 싸움의 끝장에 사리 같은 그의 시가 박혀 있다. 그는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 시인이다. 이가 깨지고 피투성이가 되는 한이 있어도 끝내 시를 붙잡고 놓지 않는다. 그는 그토록 지독한 사람이다.
시에 대한 그의 이러한 자세와 독기가 그의 시의 독특한 아우라를 만들어낸다. 진술과 사변이 넘쳐나는 요즘의 시들과 대비해 볼 때, 그의 시는 확연히 다른 데가 있다. 그는 진술이 몰고 다니는 수다스러움에 대해 거의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는 진술의 한계와 폐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시인이다. 모든 진술(언술)은 그 욕망의 속성상, 가짜 위로와 사이비 교리의 진원지라는 근원적 혐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가 싫어하는 것도 바로 진술의 이런 점 때문일 것이다. 진술은 끊임없이 자신을 복제하고 확장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말이 말을 낳고 낳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과잉을 감당하지 못하고 말은 마침내 익사하고 만다. 바벨탑의 단죄처럼. 말이 지나간 자리는 이렇듯 폐허만 남는다. 말로서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이 빚어낸 결과이다. 그는 시로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생각에 단호하게 돌을 던진다. 그는 시가 구원이 될 수 없음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은 사람이다. 시로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이야말로 그가 진술(진술시)을 싫어하는 결정적인 이유이다. 시는 그냥 시일뿐이다. 그냥 거기 있을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그의 시는 출발한다. 그의 시작(詩作)의 방법론 또한 이런 생각과 매우 유관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그의 시 미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시작의 방법론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가 그토록 싫어하는 진술의 대척점에 묘사가 있다.

이윤학, 그는 응시와 묘사의 시인이다. ‘묘사’야말로 그를, 그의 시를 그의 시답게 만드는 원료이며 키워드이다. 그에게 묘사는 진술을 극복하는 대안이며, 시적 감동과 성취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수단이다. 그는 ‘말하기(진술)’보다 ‘말 안하기(묘사)’를 통해 고통의 뇌수를, 들끓는 상처를, 욕망의 안팎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자 한다. 그의 시는 매미 소리 자욱한 여름 한낮의 땡볕처럼 쨍쨍하고, 호수 밑바닥의 돌처럼 먹먹하고, 바람에 씻기는 버드나무처럼 골똘하다. 그것이면 된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말을 하는 순간, 시는 실패하고 만다. 이 게임에서는 먼저 입을 열거나 숨을 쉬는 자가 진다. 어릴 때 즐겨했던 숨 참기 놀이나 말 안하기 놀이에서처럼 말이다. 요컨대, 진술(생각의 욕망)로 덧칠한 그림보다 군더더기 없는 한 컷의 사진이 훨씬 더 깊은 여운과 감동을 준다. ‘그립다’고 백 번 말(진술)하기보다 ‘그리운 정황’을 포착하여 묘사하는 것이 훨씬 더 그립게 한다. 이것이 바로 묘사의 힘이다. 묘사는 말없음의 자장이 만들어내는 거리와 여운의 미학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더 깊이 각인되는 필생의 장면 같은 것이다. 이윤학은 이러한 묘사의 매혹을 잘 알고 있는 시인이다. 묘사로 다져진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어떤 염결성마저 느껴질 때가 있다. 그는 응시와 묘사라는 화두를 가지고 자신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담금질해왔다. 진술은 철저히 죽일 것. 무엇을 말하려 하지 말 것. 설득하지 말 것. 대상의 범위를 최대한 좁힐 것. 눈에 핏발이 설 때까지,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릴 때까지 지켜볼 것. 이것은 그가 그의 시를 위해 지켜야 할 스스로의 엄혹한 계율이다. 그는 시를 ‘쓰’지 않고 ‘옮긴다’는 표현을 고집한다.

시작(詩作) 과정을 대강 도식해보면, ① 본다 -> ② 떠올린다 -> ③ 쓴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본다’는 것은 시 이전의 현상 세계에 대한 응시이다. 시인은 이 봄(觀察)을 통해 최초의 시적 동기를 포획하는데, 이것은 곧 묘사의 질료가 된다. 무언가를 골똘히 관찰하고 한 곳을 집중적으로 응시하면서 시인은 어떤 ‘시적인 것’을 떠올린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일 수도 있고, 새로운 발견일 수도 있다. 시인은 이 떠올리는 단계에서 생각을 버무린다. 바야흐로 진술이 개입하려는 참이다. 그리고 시인은 시를 쓴다. 이때, 쓰는 행위는 시작의 태도와 방법론에 따라 다시, 받아 적는다, 짓는다(만든다), 옮긴다 등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의 생각을 ‘받아 적’거나 ‘옮기’거나 ‘만드는’ 것은 매한가지일 터인데 굳이 이렇게 나누는 것은 묘사(이미지)와 진술(메시지)에 대한 시인의 시적 기울기를 판가름해 보는 하나의 단서가 되겠기 때문이다. 받아 적거나 만든 시라면 이는 진술 쪽에 더 비중을 둔 시일 것이다. 그러나 옮긴 시라면 훨씬 묘사적인 시가 될 것이다. 전자는 자의적으로 메시지(진술)를 생산하고 통어한다는 전지적인 입장인 반면, 후자는 이미 있는 것(시)을 그대로 옮길 뿐이라는 데서 확연한 입장 차이를 드러낸다.
이윤학의 시적 입장은 물론 후자이다. 그는 철저한 묘사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시를 쓰지 않고 옮긴다. 읽는 사람에게는 얼핏, 그의 시가 재미가 덜해 보이는 것도 이와 같은 시작 방법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읽을 때에는 약간의 인내가 필요하다. 거의 진공 상태에까지 몰아가는 묘사가 독자를 숨 막히게 만든다. 그러나 숨을 참고 한 편의 시를 다 읽어냈을 때 찾아오는 여운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그 되새김에 값한다.
이번 시집 <<그림자를 마신다>> 맨 앞에 실린 <시인의 말>을 곰곰이 읽어보면 그 속에 사실상 그의 시작의 태도와 방법론이 고스란히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시흥시 목감동에서 2년을 살았다. / 4층 사무실에서 텃밭을 바라보았다 /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옮겨 심는 걸 지켜보았다. / 나도 한 뙈기의 텃밭을 가꿀 수 있다고 믿어 보았다 / 거둘 수 없는 수확의 기쁨이 찾아왔다/ 그것이 내게 시를 옮기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 <시인의 말> 전문 -

그는 살았고, 바라보았고, 지켜보았고, 믿어보았으며, 거둘 수 없는 수확의 기쁨의 힘으로 시를 (쓰지 않고)옮겼다. 거둘 수 없는 수확은 창작의 수확 즉, 옮기기 이전의 시일 것이다.

그의 시에는 결코 전 풍경이 드러나지 않는다. 전 풍경은 전 규모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지만 그러나 그런 류의 그림은 얼마나 밋밋하고 공허한가. 시가 사진이라면 그는 접사의 방식을 즐긴다. 응시하는 피사체의 중심부에 앵글을 바짝 갖다 대고 나머지 배경은 흐릿한 상태로 그냥 버린다. 그렇게 얻은 한 장의 사진이 깨끗하면서도 참 아름답다. 그것이면 족한 것이다. 나는 내 시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는가. 너무 큰 것을 염두에 둔 자, 작은 하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라. 거기에 시의, 세상의 핵심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도 그 빛나는 묘사의 힘으로 주옥같은 시편들을 한 다발의 구슬처럼 꿰어놓았다. 그의 시는 해금이 다 가라앉은 뒤의 물속처럼 맑고 투명하다. 그것은 응시의 깊이가 한층 더 깊어지고 그윽해진 결과이다. 몹시 울고 난 뒤의 하늘처럼, 추억과 상처의 숨 막히는 고통의 통로를 걸어오는 동안 그는 이제 더 멀리, 더 깊이 이르는 응시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번 시집은 상처의 중심에 있고자 갈망했던 지난 시집들과는 변별점을 갖는다. 그는 풀밭에 앉아 문득 하늘의 깊이를 본다.

고래 같이 생긴 여객기 한 대
천천히 하늘에 길을 냅니다.

저 하늘 끝이
시퍼런 물의 표면이란 생각이 듭니다.

물고기도 아닌 우리가 어떻게
물속에 앉아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물속에 가라앉은
무수한 섬.

어떻게 생겨났는지.
언제 떠올라 사라지는지.

저 은빛 고래 뱃속에도
수백 개의 옮겨가는 섬이 있겠지요.

- <풀밭> 전문 -

만일, “저 하늘 끝이/시퍼런 물의 표면”이라면 땅 위에 존재하는 우리는 “물속에 가라앉은/무수한 섬”처럼 막막할 것이다. 심연의 적막을 견디는 일은 답답하고 고통스럽다. 마치 ‘저수지에 빠진 돌’처럼. 그 깊이와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의 무게(중력)를 극복하고 물의 표면 위로 떠오르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설사 표면에 이르렀다 해도 물을 완전히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 살아있는 한 중력이 나를 지배할 것이므로. 나의 존재를 물속으로부터 완벽하게 부양시키는 방법은 유체이탈 즉, 죽음뿐이다. “언제 떠올라 사라지는지” 죽음은 현상 세계를 벗어나는 유일무이한 길이며 구원임을 그는 얼핏 독백한다. 그러나 독백할 뿐, 적극적인 탈출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그 까닭은, “거꾸로 박혀 있는 어두운 산들이/돌을 받아먹고 괴로워하는 저녁의 저수지//바닥까지 간 돌은 상처와 같아/곧 진흙 속으로 들어가 섞이게 되네” <저수지>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에서처럼 고통에 대한 자발적인 반응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는 지금 상처의 중심에서 다소 멀어져 있다. 끝 간 데까지 가본 고통의 시간이 그와 대상 사이에 간격을 만든 것이다. 어둡고 침침한 ‘저수지’를 빠져나온 그는 풀밭에서 젖은 몸을 말리며 더 깊고 더 넓은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돌을 받아먹고 괴로워하는 저녁의 저수지”에서 한낮의 투명하고 푸른 하늘로 눈을 돌린 것은 이처럼 우연이 아니다. 앞서의 <저수지>가 침잠하는 고통에 반응하는 울음이었다면, 위의 시 <풀밭>은 눈물이 그친 뒤에 찾아오는 투명한 슬픔 같은 것이다.
그의 몸속에는 잘 늙지도 죽지도 않는 한 마리(!) 소년이 살고 있다. 소년이 사랑했던 소녀는 오래 전에 죽었다. 소녀의 죽음이 소년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소년은 추억의 테두리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소년의 비극이자 곧 그의 비극이다. 그는 소년과 함께 뼈아픈 상처의 처소를 돌아다니며 사랑의 부재를 확인한다.

이 한 줄의 길
이 한 타래의 길
거두어들일 수 없네.

어디로든 도망치자고,
나를 자꾸 끌고 가던 이 길
끝나는 곳까지 가지 못했네.

쭉 뻗은 미루나무
가지마다에
나를 조르던 너의
빛나는 눈빛, 깃을 터는 그
조르던 말들......

망설임은 이제 나에게서 떠나가고 없네.

- <직산 가는 길> 전문 -

직산은 사금이 있던 곳이고 연탄 공장이 있던 곳이고 붉은 벽돌집이 유난히 많던 곳이다. 그곳은 예전에 사금을 채취하던 곳이고 누군가가 죽은 아픈 기억의 장소이다. 소년은 오래 전에 그곳을 떠나 이제 중년이 되었지만, 그 안의 소년을 통해 여전히 그 길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머릿속에 각인된 고통스런 ‘한 타래의 길’을 ‘거두어들일 수 없’음에 절망한다. 아플수록 기억은 이토록 선명한 것인가. 당장 달려가서 ‘나를 조르던 너의 빛나는 눈빛’과 ‘그 조르던 말들’을 들어주고 싶지만 그러나 이미 늙어버린 그에게는 머뭇거릴 시간조차 없다. ‘너’의 주위를 맴돌며 망설이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이다. 세월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회한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먼 길을 걸어 온 자의 곤구함에 더하여 아련한 슬픔이 오래도록 남는 시이다. 의식했든 안 했든 소년은, 그는 어느 듯 불혹의 문턱을 넘은 중년이 된 것이다. 귓가에 선명한 말들을 뒤로 하고 그는 또 어쩔 수 없이 숙명처럼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다. 오오, 실패한 사랑아.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오리가 쑤시고 다니는 호수를 보고 있었지.
오리는 뭉툭한 부리로 호수를 쑤시고 있었지.
호수의 몸 속 건더기를 집어삼키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을 쑤시고 있었지.
나는 당신 마음위에 떠 있었지.
꼬리를 흔들며 갈퀴손으로
당신 마음을 긁어내고 있었지.
당신 마음이 너무 깊고 넓게 퍼져
나는 가보지 않은 데 더 많고
내 눈은 어두워 보지 못했지.
나는 마음 밖으로 나와 볼일을 보고
꼬리를 흔들며 뒤뚱거리며
당신 마음위에 뜨곤 했었지.
나는 당신 마음위에서 자지 못하고
수많은 갈대 사이에 있었지.
갈대가 흔드는 칼을 보았지.
칼이 꺾이는 걸 보았지.
내 날개는
당신을 떠나는 데만 사용되었지

- <오리> 전문 -

모자람 없이 충만한 사랑은 종교적 찬양에 다름 아닐 것이다. 찬양은 무미건조한 동어반복에 불과할 뿐이어서 인간다운 드라마가 없다. 선천적인 모자람으로 끝내 실패했을 때, 사랑은 더 절실한 애틋함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정인(情人)을 앞에 두고,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뱅뱅 도는, 끝내 돌다가 말았을 때의 그 허전함과 안타까움이야말로 드라마의 백미가 아니던가.
호수의 가장자리를 맴돌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 취하고 미련 없이 떠나버리는 오리의 무지함과 이기심을 시인 자신의 심경에 빗대고 있는 이 시는, ‘호수’를 ‘그 여자’로 바꿔놓고 보면 그녀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는 호수에 앉아 부지런히 먹잇감을 찾는 오리이다. 그는 마치 당연한 듯 그녀의 “몸 속 건더기를 집어 삼키고”, 그녀의 “마음을 쑤시고”, 그녀의 “마음을 긁어”댄다. 그러나 내색 없는 그녀의 마음은 너무 깊고 넓어서 그가 “가보지 않는 데” 더 많다. 그는 오직 편의대로 그녀의 마음 가장자리에서만 놀다가 밖으로 나와 “볼일을 보고” 필요하면 다시 그녀의 품으로 가서 떠다니곤 한다. 마치 돌아온 탕자처럼. 그러나 그는 끝내 그녀의 중심에는 가지 않고 숨기 좋은 갈대밭 사이를 서성이며 그녀의 눈치를 본다. 이윽고 그의 속셈(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녀가 분노의 칼을 뺄 때,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후다닥 날개를 쳐서 달아난다. 그녀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내 날개는/당신을 떠나는 데만 사용되었지.”라니! 그녀에게 올 때부터 그는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나자마자 떠날 궁리부터 하는 사람은 비겁하다. 그는 어쩌면 세상 대부분의 남자들과 닮았다. 그 여자야말로 “우리 모두가 함께 붙어먹던 여자(김요일 시인의 시 <인어이야기>에서 따옴)”가 아니던가. 그와 우리는 공범이다. 이 남자 저 남자에게 휘둘리다 홀로 초라하게 늙어가는 한 여자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가 꿈꾸던 사랑은 그 자신의 이기심과 망설임 때문에 물거품이 되고, 결국 앙금처럼 뼈아픈 후회로 남게 된다. 제 발로 떠나온 사랑 때문에 그와 우리는 지금, 몹시, 아프다.

마음의 끝에는
돌아오지 않을 행성 하나 있어

뿔뿔이 흩어질
꽃씨들의
여려터진 마음이 있어

민들레는 높이 안테나를 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 <민들레> 부분 -

그는 마음이 여리다. 여린 것들에 대한 연민이 더욱 그를 여리게 한다. “뿔뿔이 흩어질/꽃씨들”은 어쩌면 별의 행로와 닮았다. 지금은 함께 모여 있지만 곧 바람에 흩어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꽃씨들. 남김없이 다 날아갈 때까지 그는 새끼를 품은 전갈처럼 꽃씨들을 지키고 있다. 고독한 적막을 견디고 있다. 그는 이런 여린 마음의 촉수로 버려지거나, 갉아 먹히거나, 바보처럼 당하는 속수무책인 것들에 대해 무한한 연민과 애정을 보낸다. 그가 쳐놓은 그물눈은 촘촘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돋보기 초점 같은 눈으로 벌레 먹은 후박나무 입사귀체(<후박나무 입사귀체>)의 저 아낌없는 심성을 더디게 오랫동안 비추는가 하면, 장미 다발이 시드는 과정을 지켜보고자(<뿌리>) 갈망한다. 그는 바닥의 물이 다 마르도록 수도꼭지를 꼭 껴안고 있는 양동이(<수도꼭지>)가 되었다가, “내장이 끝날 때까지 기어가다/멈춘 꿀벌(<끈>)”이 되기도 하면서 고통스런 시간의 극한을 고스란히 감내하고자 한다. 넌덜머리나도록 지독한 그의 이런 응시가 그의 시를 만들어 낸다. 아니, 옮기게 한다.

목선 하나 납가새 덮인 뻘 위에 묶여 있다.
목선 하나 물 나간 뻘 위에 붙어 있다.
한 바지게 뻘이 목선 안에 고여 있다.
납가새 목선 안에서 자라고 있다.

밀물이 들어오면 바닥이 들려
파도 체를 타고 쏠려다니는 납가새
목선 안에서 자라고 있다.

목선 바닥에 뿌리 닿은 납가새
목선 바닥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있다.

- <납가새> 전문 -

그는 시에게 아무런 말도 걸거나 간섭하지 않음으로써, 시를, 쓰지 않고 그냥 옮김으로써, 시적 대상과의 완전한 합일을 꿈꾼다. 현상 세계의 크고 작은, 사소하거나 사소하지 않은 모든 것들은 이미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시 이전의 것인 것이다. 불이(不二),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가 거기에 있다. 나는 그의 시를 통해,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새삼 깨닫게 되었음을 숨기지 않겠다. 그의 표현대로, “언어는 정신까지 가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의 시에는 오색 무늬를 품은 구슬들이 자그락거리고, 잘 구워진 그릇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쨍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