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은 천만원이 훌쩍 넘게 아이들 등록금을 내야 하는 터라 셈을 잘 해야 하는 달이다.

이사  이후로 미루어 온 머리 손질을 더는 참을 수 없어, 인터넷을 뒤적여

시장 안 골목길에 있는 작은 미용실을 예약했다.

좁고 옹색한 공간에 외투를 벗어둘 자리를 찾는 것조차 민망한 지경이라 한 쪽 구석에

뭉뚱그려 두고는,예약까지 한 터에 차마 나갈 수가 없어 이끄는대로  의자에 앉았다.

원하는 머리 색깔이며 길이, 펌에 대해 얘기를 하니 시원스레 대답을 하길래,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실내를 둘러보았다.

서너명만 있어도 어깨가 부딪힐 듯 좁은 공간에 손바닥만한 다육 화분들이 틈새 곳곳 가리지 않고 놓여져 있는 데다가,갖가지 미용 도구마저 이곳 저곳 분간없이 쌓여있어 발 내딛기도 조심스러웠다.

벽면에 철사로 동여맨 대나무는 거울 옆면을 타고 올라가 노랗게 뜬 잎이 천장까지 어지러운데, 함께 꽂힌 먼지 낀 수국 조화 두 송이가 생경스러웠다.

쉰 마리가 넘는 열대어가 연신 꼬리를 흔들며 헤엄치고 있는 두 개의 작은 어항에서는 산소 발생기가 웅웅거리는 소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고, 그 위 선반에 얹힌 TV에서는 큰 소리로 같은 뉴스를 반복하는 종편 채널이 고정되어 있었다.

예약이 무색하게 기본적인 처치만 하고, 주인은 다른 손님들의 머리를 만지며 연신 수선스럽다.

대선 유세 방송이 나오자 일흔이 넘었다는 할머니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남존여비 철학을 마구 쏟아내고,

그 자리에 없는  앞집 여자의 사생활을 시작으로 동네 사람들을 차례로 도마에 올려 머리 떼고,꼬리 자르는 품평회가 계속 됐다.

아무리 미용실이 수다떠는 곳이라지만, 듣고 있기에 괴롭고 슬며시 짜증이 올라왔다.

손이 느린 것인지, 일머리가 없는 것인지 가늠키 어려운 주인은 ,다섯 번을 이리 저리 부산스레 움직여야 겨우 머리 손질 한 번을 하곤 했다. 

그 와중에도 내게 자신의 머리 손질에 대한 확신과 주장을 끈질기게 설명하며 너무 진도가 느린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하는 나를 타박했다. 

평소 서너 시간이면 끝나는 머리 손질이, 딱딱하고 불편한 의자에 다섯 시간째 앉아있건만, 주인 멋대로 펌의 종류를 바꿨다고 말해 황당해하는 내게 말도 안되는 자기 변명을 늘어놓으며, 심지어 아직 반도 하지 못한 참이라니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어 속이 답답하고 화가 났다.

손님의 취향이 아닌 자신의 고집대로 머리를 만지며 오히려 큰 소리를 치다니 뭔가 맞지 않았다.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 그 상황이  너무 불편해 급기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허리가 뻣뻣해지고, 쪼개질 듯한 편두통까지 밀려와  더이상은 견딜 수 없어 그만  마무리해달라고 했더니,

주인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못 가게 붙잡고는 저녁 땅거미가 내리고, 장장 일곱시간만에 자신의 취향에 맞춰 머리 손질을 끝내줬다.

터질 듯한 관자놀이를 손톱 끝으로 눌러가며  도저히 걸을 수 없이 머리가 아파 남편에게 전화를 했더니

이미 문자로 사정을 알고 있던 남편이 데리러 오겠다고 한다.

걱정이 잔뜩 묻은 얼굴로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편의 손에 매달려 차에 오르자마자 어린애마냥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픈 머리를 감싸쥐고 집에 들어서니, 남편이 나를 위해 사온 파이가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게 한 눈에 띄었다.

머리가 아파 정신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약을 먹고, 남편이 한 시간 가까이 머리를 주물러주고 나니, 그렇게 아프던 편두통이 겨우 참을만해졌다. 

머리 하느라 고생했다며 다음엔 좋은 미용실 가라는 남편의 위로에 싱겁게 웃으면서도 코 끝이 찡해졌다.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있는 괴로움을 겪어보니,

어제도 오늘도 한결같이 나와 마주보고 서 있는 따뜻한 남편이 새삼 소중하고 고마웠다.

속초 물치항(2022년 2월 초) / 부서지는 겨울 파도가 누군가에게는 시련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나를 시험하고 단련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지금의 내 딸보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내와 엄마, 며느리라는 자리가 주어졌다.

어제까지 엄마,아빠의 딸로서 맛있는 것, 예쁜 것만 찾아다니던 철부지가 감당하기엔 고되고 벅찼다.

남편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싫어 아무리 피곤해도 그보다 더 늦게 자고, 더 일찍 일어나 단장했다.

열 달 힘겨운 입덧 끝에 낳은  예쁘고, 자그마한 아이의 미래가 엄마인 내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그 두려움에 육아서를 읽고 또 읽으며 부지런을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마에서 과장하는 것 인 줄만 알았던 시어머니의 날 선 말투와 못마땅한 눈초리에 주눅 들고, 매일 바늘 방석에 올라 앉아 있는 날들은 힘들기만 했다.

시대에 뒤떨어져 남편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 답답한 사람이 되기 싫어 늘 현실 이슈와 화제에 귀를 열어 두고,

한 발 앞 서 아이들에게 비젼을 보여주는 열린 엄마가 되고자 부단히 노력하면서,

시어른들께도 인정받는 며느리가 되고 싶어 입 안의 혀처럼 몸을 낮추며 30년 가까이 지내왔다.

후회없이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지만, 다시 되돌아가라면 손사래치고 싶을 만큼 어렵고 힘든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상처받고 눈물 지으면서, 깨닫고 여물어갔지만, 어느덧 나라는 알맹이는 쪼그라들어 껍데기만 걸치고 있는 심정이었다.

세상에서 길 잃고, 쓸쓸하고 헛헛한 마음이 드는 날은 외로웠다.

남편도, 아이들도 이방인처럼 느껴져 나 혼자 창 밖에 서 있는 기분이 들 때면 가서 위로를 받고 오는 곳이 있다.

길 가 모퉁이에 있는 오래된 도서관이다.

그 곳에 가면 서가 가득 꽂힌 책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늘 한결같이 나를 기다려주는 오래된 친구같다.

내가 찾아가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것 저것  캐묻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줄 뿐이다.

하 완, 오쿠다 히데오, 구라치 준의 싱거운 농담같은 글을 보면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의 단숨에 휙 읽혀지는 이야기에는 일일 드라마같은 익숙함과 정겨움이 있어 얼었던 마음이 휘휘 풀어진다.

A.J.핀이나 오츠 이치, 기리노 나쓰오등 내로라하는 사회파 작가들은 서늘하고, 무서운 냉혹한 인간상을 보여줌으로 내 고민을 가볍게 보이게 하는 마술을 부리고,

가지이 모토지로, 기 형도의 글은 너무 가슴이 아파 어느새 눈물이 흐르며 작품 속 인물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뿐이랴!

저기 멀찌감치 떨어져 구석진 곳에서는 경매와 주식으로 부자가 되게 해주겠다며 열심히 손짓하는 고마운 친구도 있고,

앞 줄에는 미술사,연극사등의 교양서와 시대의 트렌드를 담은 최신 인문서를 쓴 작가들이 언제든 내 손을 잡아주려 준비하고 있다.

그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를 잊기도 하고,때로는 돌아보면서 그렇게 깊고도 따뜻한 위안을 얻는다.

인간의 삶이 천근만근 무거워 보이다가도 종잇장처럼 가벼워질 수도 있다는 오래된 진리를 떠올리며,

시장에 들러 저녁 찬거리를 사서 다시금 온전한 내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그리 멀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사이보그가 되다  /  김 초엽, 김 원영

비좁은 우물에 사는 참개구리는 머리 위에 이고 있는 손바닥만한 하늘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산다.

자갈을 쌓아 바닥을 매끈하게 고르고, 향기 나는 꽃으로  둘레를 장식한들 그저 축축한 우물 바닥의 삶일 뿐이다.

자기만의 세상을 떨치고, 과감히 우물 위로 올라온 참개구리만이

언덕 위에 우뚝 솟은 떡갈나무를 볼 수 있고,

들판 가득 핀 야생화의 향기도 맡을 수 있다.

' 자기만의 세상 '을 독일의 한 학자는 ' 움벨트 '라고 지칭했다.

같은 나무에 집을 짓고, 같은 공간,같은 시간을 살아도 다람쥐의 움벨트와 개미의 움벨트는 다르다.

그래서 그들은  영역이 겹치지도 않고, 서로의 삶에 관심도 없다.

사람은 더욱 섬세하고 견고한 자기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있다.

자신과 살아온 배경이나 조건이 다른 이에게는 손짓은 커녕  미소를 보내는 것에 인색하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역시나 같은 태도를 보인다.

나와는 ' 다름 '을 차별하고, 함부로 단정지으며 백안시한다.

서로 다른 색이 어우러져야 오묘한 빛깔이 나오듯, 사람도 타인의 움벨트 속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더 큰 세상을 볼 수 있다.

스웨덴과 영국에서는 사회적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해 ' hen ' 과 ' ze ' 라는 중립 대명사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마찬가지로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인 ' 비장애중심주의 ' 의 이데올로기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저들은 우물을 허물고, 너른 바다에서 함께 살기를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손바닥보다 더 큰 하늘을 보기 위해서, 우물 속의 철학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나와는 다른 타인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나의 움벨트가 풍요로워지는 방법이 아닐까.

메타버스  /  김 상균

인류의 삶을 크게 변화시킨 몇 차례의 파도가 있었다.

농업에서 공업 사회로의 변환을 이끈 1차 산업 혁명으로 배고픔이 해소되었고,

각종 전기 제품들을 대량 생산해 풍요와 여유를 맛보게 한 2차 산업 혁명을 거쳐,

컴퓨터를 기반으로 인터넷과 스마트 폰이라는 혁신적인 발명이 가져온 3차 정보화 혁명이 무르익어

이제는 가상 현실세계인 ' 메타 버스 ' 를 이용한 4차 혁명 시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증강 현실, 거울 세계, 라이프 로깅, 가상 세계를 서비스하는 기업들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뛰어 오르고,

기존의 거대 글로벌 회사들 역시 메타 버스를 접목시켜 좀 더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중이다.

그러나, 코로나 19로 인한 거리두기로 인해 준비 없이 등 떠밀려 메타 버스에 올라탄 사람들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좌충우돌 부딪히며 소외감과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줌(zoom) 을 이용한 학교 수업과 각종 강의, 비대면 은행 업무의 확장, 오프 점포의 폐쇄와 온라인 쇼핑으로의 전환,

다종 다양한 앱을 통한 정보의 활용등 특히 인터넷과 전자 기기에 익숙지 못한 중,장년 세대에게  언택트 삶은

감정 공유를 할 수 없는 메마르고, 불편한 삶에 다름 아니다.  

개인이 원하지 않는다고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역행하거나 막을 수는 없으니

느지막이라도 메타 버스에 올라 타지 않는다면, 점점 더 소통의 기회는 줄어들고 뒤처지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으로 인해 편리함을 넘어 종속을 느끼고, 어느새 바삐 따라가야만 하는 인간 고립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이 과연 사람을 위한 따뜻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 .  .

가상 세계의 확장으로 인한 언택트 삶은 때로 편리하고, 시간의 단축과 군더더기 없는 연결로 이끌기도 하지만,

인간은 다른 사람과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함께 하며 호흡할 때

비로소 편안하고 열린 감정의 교류를 통해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즐거움을 충분히 만끽하게 된다.

피할 수 없는 메타 버스와 내가 숨쉬는 현실 세계의 균형추를 어떻게 맞출 것인가는 오롯이 나의 몫이다.

어스름이 내린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찬 바람을 뚫고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을 보러 갔다.

웅장하고 화려하면서도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무대와 배우들의 열연에 기립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지적인 오만과 허영심의 광기로 가득찬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신이 만들어 낸 피조물의 흉측한 몰골이 맘에 들지 않자,

양심과 책임은 저버린 채 서슴없이 ' 괴물 ' 이라 부르며 한 겨울 밤, 어두컴컴한  숲으로 그를 쫓아낸다. 

이기적인 호기심으로 만들어 졌다가 한낱 장난감처럼 내쳐진 그는,

사람들에게 호의와 순수를 이용당하고, 악의와 조롱으로 배신당한 채 추위와 배고픔과 세상의 냉대에 깊이 상처입고 피폐해진다

그저 자신을 바라보고, 따뜻한 말을 걸어 줄 온기만을 간절히 원했던 그이기에

인간의 몸을 빌어 태어났으나 쳐다보기조차 역한 괴물로 여겨지는 자신의 존재 근원에 대해 깊이 절망하게 되고,

주체할 수 없는 원망과 분노로 박사의 가족들을 잔인하게 죽여 복수함으로써 스스로 ' 괴물 '이 되어 파국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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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전, 소설 출간 당시에는  ' 모던 프로메테우스 ' 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창조하고, 절대자 제우스에게 도전한 인물이기도 하니,

모던 프로메테우스로 지칭되는 사람은 당연히,

괴물을 창조해 신의 영역에 도전한 ' 빅터 프랑켄슈타인 ' 박사라고만 생각했다.

이 소설을 쓴 ' 메리 셸리 ' 는 당시 20살의 어린 나이였는데,

뿌리 깊은 남녀 차별로 인해 여자의 소설 집필은 허용되지 않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익명으로 출간했다고 한다.

포기하고 죄절하기보다 단단한 사회적 금기에 도전해, 마침내 높은 벽 그 너머의 세상을 보는 용기야말로

절대자 제우스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 준 프로메테우스보다 못 할 것이 무엇일까. 

또한, 이름도 없이 버려져 괴물로 치부되었던 피조물이,

자신의 창조주인 박사를 찾아 그의 어리석음으로 벌어진 비극을 질타하며,단순히 순종적인 객체로 남기를 거부하고

불합리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도전해 보려는 주체적 의지를 보이는 것 역시 프로메테우스와 닮아 있다. 

평범한 삶이 소설처럼 극적이거나 사회의 변화에 한 획을 긋지는 않지만,

느리고 소소하더라도 어제보다 한 발짝 만큼씩은 앞으로 더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우리 역시 모던 프로메테우스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