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춘천시 우두동에 있는 한 공병부대에서 군종사병으로 군복무를 바쳤다. 남이 보기에 무슨 대단한 신앙이 있어서 군종사병으로 보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다. 매주 군목이 설교하는 시간 동안만이라도 마음놓고 잠이라도 좀 자려고 군인교회에 빠지지 않고 나간 것이 인연이 되어 군종사병이 되었을 뿐이다.

  군종사병으로 근무하는 3년 동안 해마다 봄이면 부활절 예배를 보았다. 당시 부활절 예배는 꼭 군민 합동으로 춘천 시청 광장에서 새벽 촛불예배로 보았는데, 나는 아직도 처음 촛불예배를 보던 날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그날 내무반에서 일어난 것은 새벽 네 시였다. 단 일 초라도 더 자고 싶은 마음을 달래고 군인교회로 가자 부지런한 병사들은 벌써 군인교회 앞마당에 모여 있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초 한 자루씩을 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군목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4열 종대로 줄을 맞추어 춘천 시내를 구보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공병부대는 소양강 건너편에 있었으므로 춘천 시청으로 가기 위해서는 소양교를 건너 30여 분 간 구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군대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겠지만 병사들은 구보하기를 그 얼마나 싫어하는가. 그러나 그날의 새벽 구보는 참으로 신선했다. 싫기는 커녕 새벽달을 안고 한없이 길이 끝나는 곳까지 달리고 싶었다. 아무리 달려도 힘이 용솟음칠 거 같았다.

  그것은 손에 쥔 초 한 자루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다들 손에 소중히 초 한 자루씩을 쥐고 달리고 있었다. 다들 평소와는 달리 진지하고 경건한 표정들이었다. 봄날의 새벽 어둠 속에서 초 한 자루를 손에 쥐고 왜, 무엇 때문에 어디로 향하여 달리고 있는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춘천 시내를 씩씩하게 달렸다.

 시청 광장에는 부활절 예배를 보러온 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른 부대에서 온 군인들의 모습도 더러 눈에 띄었다. 우리들은 민간인들 틈에 섞여 예배 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예배는 먼저 촛불을 밝히는 의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촛불은 단상에서 처음 붙여져 맨 앞자리에 있는 사람의 초에 옮겨졌다. 그리고 곧바로 뒷사람에게 연달아 옮겨졌다. 하나씩 촛불이 옮겨질 때마다 어둠이 조금씩 옷을 벗고 사라져갔다.

  나는 줄의 한 끝에 서서 긴장된 마음으로 내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내게 불을 붙여준 사람을 어느 주름투성이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뒤를 돌아서자마자 내게 맑은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꺼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펴 촛불을 감싸면서 가만이 내 손을 거머쥐었다. 나도 할머니의 손을 살며시 거머쥐었다. 순간 마음이 떨렸다. 할머니의 마음의 빛이 내 더러운 가슴속을 환히 다 밝히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할머니와 나의 손은 한동안 촛불이 다 옮겨붙을 때까지 그렇게 맞닿아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촛불을 옮겨줄 차례였다. 내 뒤에는 중학생 모자를 쓴 한 소년이 서 있었다. 나도 할머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소년에게 맑은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할머니가 가만히 촛불을 감싸면서 동시에 내 손을 거머쥔 것 처럼 나도 소년의 손을 거머쥐고 불을 붙여주었다.

  춘천 시청 광장은 어느새 촛불의 광장이 되어 있었다. 어둠 속에 파묻혀 있던 시청 광장은 마치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 같았다. 사람들은 모두 가슴께까지 촛불을 들고 예수의 부활을 기뻐하고 있었다. 나도 가슴 저 깊은 속에서 치솟아오르는 부활의 빛과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까 그 소년은 또 누구에게 불을 붙여주고 있을까..하고 고개를 돌려보았다.

  소년은 검은 안경을 쓴 한 맹인의 초에 불을 댕겨주고 있었다. 한 손엔 흰 지팡이를, 또 한 손엔 초를 든 맹인이 두 손을 모아 소년으로부터 촛불을 옮겨받고 있었다. 순간, 내 가슴은 심하게 뛰었다. 맹인의 손에도 촛불은 켜져 있었다. 빛을 볼 수 없는 그의 손에도 촛불은 어둠을 밝히며 타오르고 있었다. 맹인의 손에 들린 부활의 촛불! 그것은 바로 새 생명의 촛불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봄이 오면 맹인의 초에 불을 붙여주던 소년과, 비록 볼 수는 없지만 촛불을 들고 부활절 예배를 보던 그 맹인이 떠오른다. 해 뜨기 전이 가장 춥듯이 나는 늘 봄이 오기 전이 웬지 춥고 두렵다. 그러나 그 맹인의 촛불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봄을 기다리는 일도 두렵지 않다.

- 정호승, '첫 눈 오는 날 만나자' 중에서

  서울에 첫 눈이 내리기 며칠 전,  내가 다니던 대학 교정에 가본 적이 있다.

  졸업한 지 20여년 만에 가 본 캠퍼스는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특히 버스가 다니는 큰길에서부터 대학 정문에까지 이르는 학교 주변의 변화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낮고 아담하던 건물들은 대부분 대형화되고 빌딩화 되었으며, 그 안에 들어선 가게들도 예전처럼 꾀죄죄하고 구질구질한 것이 아니라 세태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는 세련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국민주택이 늘어서 있던 주택가마저도 상업지역으로 변해 24시간 편의점과 커피전문점, 노래방과 소주방 등이 번듯하게 들어서 있었다.

  물론 캠퍼스 내의 변화도 놀라운 것이었다. 대학 정문에서 본관까지 족히 10여 분은 걸어가야 하는 진입로 양쪽에 인도가 생겨나 있는가 하면, 보지 못하던 건물들이 여기저기 들어거 있어 어디 변하지 않은 곳이 한 군데도 없는 듯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변했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 단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나무들이었다. 나무들만은 20여 년 전 내가 학교에 다닐 때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어 보였다. 20여년 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지만 나무들만은 그 때의 그 키에 몸피 또한 그대로였다.

  "어째 나무들이 많이 굵어지지 않은 거 같아."

  내가 이렇게 중얼거리자 동행한 친구가 말했다.

  "나무들은 그리 급할 게 없잖아."

  나는 친구의 말에 마음이 뜨끔했다. 친구의 말을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나무들이 나보다 더 풍요오워 보였다. 잎을 다 떨어뜨려 겉으로는 비록 앙상하고 거무튀튀하게 메말라 보였으나 정작 나무들은 그동안 나보다 더 보람된 삶을 살아온 것 같았다.

  나는 나무들이 부러웠다. 나무들이 그리 변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동안 나무들은 나처럼 급하게 서두르며 살아오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였다. 사람이 보기에는 자라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겸손하게 속으로 나이테를 그으며 내면을 키우는 삶을 살아온 것 같았다.

  나무들은 볼수록 느긋하고 행복해 보였다. 반면에 나는 초라하고 불행해 보였다.

  나무들은 20여 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젊고 건강한 청년의 모습 그대로였으나 나는 어느새 황폐한 중년의 사내가 되어 있었다.

  나는 진정 나무들이 부러웠다. 20여 년이라는 시간이 똑같이 주어졌는데 왜 나무와 나는 이렇게 다른 것인가.

  곰곰 생각할수록 그것은 삶의 태도에 관란 문제 때문인 것 같았다. 나무들은 느긋하게 자신의 삶을 즐기고 기뻐하며 있는 그대로의 삶을 자족하면서 살아온 반면, 나는 그렇지 못한 거 같았다.

  나는 늘 초초하고, 무언가 더 높고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한치의 여유도 없이 정신없이 살아온 것이 아닌가. 나무들처럼 있는 그대로의 시간을 여유 있게 기뻐하면서 제대로 사용할 줄 몰랐던 것이 아닌가.

  시간이 나무나 인간을 늙고 병들게 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결국에는 다 똑같다면, 나는 진정으로 나무들처럼 느긋하고 여유 있는 삶의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었다.

  인생은 시간이다. 시간은 변화하는 무서운 힘을 우리들에게 행사하고, 우리는 또 어쩔 수 없이 그 힘에 굴복당하고 만다.

  결국 모든 것은 변한다. 오늘의 아름다움도, 오늘의 사랑마져도 내일에는 미움과 증오로 얼룩진다.

  이제 나무들의 여유 있는 삶의 태도를 한번쯤 생각해 보자. 나무들처럼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여유 있는 삶을 한 번 살아보자. 나무들은 우리 사람들처럼 한 해를 한 달 처럼, 한 해를 하루처럼 살지는 않는다.나무들은 하루를 한 해 처럼 산다.

- 정호승, 첫 눈 오는 날 만나자 중에서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그대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나는 언젠가 아기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종합병원 신생아실에 맡겨두었던 아기를 집에 안고 돌아와 안방 창가에 눕혀 놓았을 때의 일을 지금도 나는 잊지 못한다.

  무심코 무거울 것이라고만 여겼던 아기의 종잇장처럼 가벼운 몸무게. 꼭 오무린 채 결코 펴려고 들지 않던 손다락. 앙증스럽도록 작은 발 등이 나로 하여근 생명의 신비에 온몸을 떨게 했다. 창틈으로 스며든 늦가을 햇살이 갓난 아기의 얼굴에 꼬물거리면 아기는 눈을 뜨는 둥 마는 중 못내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아버리곤 했다.

그러던 아기가 차차 자라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을 때, 아기의 그 맑고 푸른, 죄와 악의 티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아기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발견했을 때의 그 놀라움이란 또 무엇으로 표현해야 좋을까.

나처럼 추악하고 죄 많은 자의 모습이 아기의 맑은 눈동자에 비친다는 사실이 퍽 부끄럽기조차 했다.

  그러나 나는 아기의 눈동자 속에 비친 내 모습을 그윽이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지상의 천사와 다름없는 아기가 자신의 눈동자 속에 내 모습을 담아준다는 사실이 무척 행복했다.

  나는 나의 그런 행복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나 좋은 글을 쓸 능력이 별로 없는 나는 마음뿐이었지 그것을 글로 표현하기는 힘들었다. 또 눈동자 속에 비친 아기의 모습을 무슨 말로 표현한단 말인가. 나는 그런 생각만 했을 뿐 그 아기가 자라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그 행복했던 순간들을 까막득히 잊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국어사전을 뒤적거리다가 '눈부처'라는 말을 발견한 나는 무릎을 탁! 칠 정도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눈부처른 말은 '눈동자에 비치어 나차난 사람의 형상. 동인(瞳人, 瞳仁), 동자(瞳子)'란 뜻으로 아기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찾아 헤매던 바로 그 낱말이었다.

 눈부처!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우리 선인들은 어찌 이런 말까지 생각해 내었을까. 일찍이 어떤 선인이 있어 아기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려내려고 고심하다가 문득 이런 말을 쓴 것이 아닐까. 한 사람의 눈동자 속에 비친 도 한 사람의 모습을 '눈 속에 앉아 있는 부처'로 표현한 선인의 마음은 내 마음속 깊이 퍽이나 아름답게 전달되었다.

 <눈부처>는 그래서 씌어진 시다. 눈부처란 말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말이 우리말 중에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으로, 죽은 말로 사전 속에서나 기록될 것이 아니라, 계속 언중에 의해 살아있는 말로 쓰여질 것을 갈구하는 마음으로 이 시느 쓰여졌다. 사어가 된 말을 다시 찾아내어 그 말에 옷을 입히고 새로운 생명과 향기를 부여하는 일이야말로 시인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 또는 자기 자신을 비록 볼 수 없으나 자신의 눈동자에 비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어 그저 막막하기만 한 사람들은 앞으로 이 '눈부처'라는 말에 관심을 기울이길 바란다.

  사랑하는 한 남녀가 '나는 당신의 눈부처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그것은 곧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되지 않겠는가.

  한 사람의 눈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일생을 같이 해야만 가능하다.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나는 일평생 당신의 눈부처가 되고 싶습니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하고 말했을 때, 이 얼마나 멋진 구혼의 고백인가.

 - 정호승, 첫 눈 오는 날 만나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