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할때부터 함박눈이 내렸다.

기상예보를 통해 눈이 내릴 것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지만,

기상예보가 가끔은 틀렸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시경에 어느 지역에 얼마만큼의 눈이 내린다는 걸 척척 예보해버리는게

세상사에 얼마만큼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통계와 숫자속에 우연성이 빠져버린다는건

조금은 답답하고, 눈에 대한 감흥조차 사라져버리게 하는 듯 하다.

부서원 중에 명문 SKY 중 한 곳에서 총학생회장 직책을 수행했다던 W 가 있다.

사람 관리가 주 임무인 부서의 특성상 이렇게 스펙이 화려(?)하고,

말이 많을 것 같고, 머리통이 굵은 녀석들은 솔직히 부담스럽다.

W 를 처음 알게된 계기는

작년 연말에 내가 이 부서를 책임지면서 부서원들과 대화가 부족한 듯 하여

부서원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게시판을 만들면서 부터다.

처음에 게시판이 만들어지고, 익명으로 게시가 가능해지자 온갖 건의사항들이 올라왔다.

몇 개의 도움되는 건의사항을 제외하고는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각 게시글에 대해서도 익명의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서로간의 폭로전과 비방의 내용까지 올라오기 시작했다.

게시판을 폐쇄해버릴까 고민도 했지만,

얼마나 얘기가 하고 싶었으면 이렇게까지 할까?하는 생각과 를 생각이 들기도 하고,

모든 얘기가 반드시 건설적인 내용만을 원한다면

소통의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게시판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런데, 어느날 이 게시판에 눈에 확 띄는 내용이 올라왔다.

"이 게시판을 우리끼리 소통을 위하여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권위에 엎드리고, 숨어서 소통을 외면하려는 건 우리가 비겁한게 아닐까요?

이 게시판의 본질이 시시콜콜한 내용으로 도배되고,

우리 스스로를 비난해서야 되겠습니까? "

부서원들간 스스로의 자정을 기대하고 있었기에 무척이나 반가운 글이었다.

익명으로 쓴 글임에도 게시판 관리자의 입장에서는 

누가 이 글을 썼는지를 찾아내는건 식은죽 먹기다.

W 였다.

유명한 대학교에서 총학생회장을 했다는게 부담스러웠지만,

나름 철이 들어서 부서장인 내 생각을 따라주는게 고마웠다.

가끔 W와 오가다 만날때면 간단한 인사만 나누고 모른척 지나쳤다.

누군가를 편애하는것 처럼 보이면 전체 부서원들의 단합을 저해하기 때문이었다.

어제는 이 녀석을 포함하여 전직(?)이 결정된 7명과 간담회를 했다.

다른 6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녀석이 대뜸

"제가 이런 말을 처음인데, 부서장님만큼 훌륭한 사람을 보지를 못했습니다.

제가 평생 스승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그러는 거였다. 칭찬에 익숙하지 못한 탓인지 내가 도리어 쑥스러워서

"이 녀석이 전직을 하려니까? 정치적인 멘트만 늘어간다."고 말했다.

기분은 좋았지만, 다른 녀석들의 눈치 때문에 더 긴 얘기를 못하고 돌려보냈다.

퇴근할 무렵 W가 다시 내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다른 부서원들 때문에 제 마음속에 있는 나에 대한 존경의 말을 다 못했다면서

꼭 나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했다.

나와 같이 근무하는 1년여 동안 나를 통해 가장 많이 배운 건

상급자로부터 엄청 혼나더라도 부서원들을 오히려 격려하는 대인배의 자세였단다.

자신이 그게 정말 어려웠는데, 어떻게 내가 그게 가능하냐고 물어왔다.

법륜 스님이 늘 말씀하신 제2, 제 3의 화살에 맞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여건이 된다면 우리 딸들에 대한 과외를 무료로 해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헤어지는 마지막 악수를 하는데, 이 녀석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이 녀석이 두 손으로 내 손을 잡고는 놓지를 않았다.

내 서랍을 뒤져서 작은 선물 하나를 꺼내주면서 이 녀석과 헤어졌다.

역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고, 마음도 따뜻해지게 한다.

인연을 만드는 것보다 이어가는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끼는 요즘이다.

이 녀석과는 아마 앞으로도 좋은 인연일 것 같다. 뿌듯한 하루의 마무리였다.

12월의 첫날부터 술로 시작했다.

마침 어제가 14주년 회사 창설기념일인데다

다음주부터 부서장들의 교체가 시작되면서 올해를 되돌아보고,

떠날 사람들에 대한 송별의 목적으로 보스가 마련한 자리였다.

17시쯤에 일찍 업무를 마무리하고 모여서 탁구를 쳤다.

복식 파트너인 L이 초보인데도 무리하게 계속 공격을 하려했고,

나 역시도 전용 탁구라켓이 아니어서 적응하기 힘들어서 게임에서 졌다.

하긴 굳이 이길 이유가 없던 게임이라 편안하게 게임을 즐긴 듯 했다.

나중에 회식시간에 J가 건배사를 하면서 탁구칠때

가장 승패에 민감한 세 명 중에 한 명이 나라고 했다.

뜨끔했다.

뭘 하더라도 집중하면서 최선을 다하자는 의미로 운동을 할때 열심히 하는 편인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모습이 좀 불편하게 보였나 보다.

회식은 사내 Cafeterria에서 했는데,

소고기 갈비살과 돼지고기 항정살과 과메기까지 푸짐하게 준비됐다.

예전 기억으로 과메기가 비릴것 같았는데,

미역 줄기랑 미나리랑 실파를 올려서 먹었는데 나름 괜찮았다.

최근에 체중이 많이 불어 다이어트 중이었는데,

폭탄주만 마실 수 없어 계속 안주를 집어 먹다보니 다이어트는 실패다.

다들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지...

술 잘 마시는것과 일 잘하는 것은 비례한다고 강변하는 J는

분위기 메이커 답게 이런저런 그룹을 묶어서 러브샷을 시켰다.

조금만 말실수하더라도 말꼬리를 잡아서 벌주(罰酒)라는 명목으로

원샷을 시키는 바람에 다들 폭탄주를 마셔서 빨리 취했다.

내가 전별 인사를 할 기회가 있어

의례적인 인사말을 하고는 김춘수 시인의 "꽃"을 낭송하였다.

회식자리에서 시를 낭송해보긴 처음이었지만,

우리의 회식 문화가 조금씩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를 읽고나서 생각해 낸 것이다.

다른 부서장들은 스마트폰으로 내가 암송하는 시의 토씨가 틀리지 않는지 집중했지만,

다행히 벌주를 마시지는 않았다.

아직은 시를 낭송하는 나도 어색하고, 그 시를 듣는 사람들도 부담스러워하지만,

분위기에 맞게 계속 시도는 해봐야 겠다.

술 잔을 돌리는 문화가 남아있다보니, 후배들이 계속 술잔을 들고 왔다.

술을 즐기는 사람들은 제 술잔으로 남에게 권하는게 미덕이라 생각하나 본데,

난 불편해서 내 옆에 앉으신 보스에게 조차 내 잔으로 술을 권하지 않았다.

회식시간이 두 어 시간 넘어가자 다들 혀가 꼬이면서

젊은 여직원을 일으켜 세워서는 시시덕거리기 시작했다.

그 여직원도 불편해보이고, 나 역시 불편했다.

보스도 그걸 느꼈는지 서둘러 8시 30분에 회식을 종료했다.

걸어서 오는 길에 아내가 탁구장에서 탁구치고 있길래,

술 냄새 푹푹 풍기면서 아내랑 같은 편이되서 탁구를 쳤다.

물론 상대편에게 술을 마시고 탁구를 쳐서 죄송하다는 양해의 말씀도 드렸고,

조용하게 탁구를 치면서 결례가 안되도록 노력했다.

복식에서는 무참히(?) 깨지고, 아내와 둘이서 단식을 했는데, 이것도 졌다.

술만 안 마셨다면 게임도 안되는데... 역시 술이 문제다.

L 처장님의 특강이 있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시스템 속에서 전체 부서원들을 소집하기가 다소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L 처장님은 보스의 7년 선배다.

내년에 정년을 앞두신 L 처장님께서 안식년에 들어가시기 전에

젊은 후배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달할 수 있는 얘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젊은 친구들을 많이 모아달라면서 보스에게 특강을 자청하셨다고 했다. 

보스의 입장도 있고해서 업무를 올스톱시키다시피 하고서는 전 부서원들을 참석시켰다.

보스와 L 처장님이 협조한 특강 시간은 1시간이었는데,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신 얘기가 많으시다며

90분쯤은 되야한다면서 말씀을 시작하셨다.

평소 말씀이 많으신 분이라 약속하신 90분 안에 절대로 교육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교육에 참석했던 부서원들의 절반은 비정규직이었다.

L 처장님이야 이 분야에서 금수저로 통하는 출신을 통해 직책과 정년을 보장받으셨던 분이다.

"여기 다들 정규직이지?" 라며 뜬금없는 말로 시작하시더니,

정규직이란 고시를 통과한 것과 같은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각자가 자기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데 주력하라고 말씀하셨다.

최근에 정규직 선발 심사에서 탈락한 J등의 눈치가 보여 내가 불안했다.

사고의 틀을 넓혀보자면서 창조 경제며, 관점 디자인이며 왔다갔다 했다.

제일 많이 하신 말씀이 "어쩌다가 이런 얘기까지 하게 됐지?" 였다.

당신조차도 어디까지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 헛갈려 하시는 듯 했다.

가장 길게 얘기하신 은퇴 이후의 계획이

사회 생활을 시작한 20대에게 얘기하는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심스러웠고,

인터넷이나 TV에서 명강사들의 강연으로 눈높이가 높은 부서원들이

이런 형식적인 말씀에 얼마나 집중할 수 있을런지 걱정되기조차 했다.

30 여분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부서원들의 눈빛이 흐려지더니,

꾸벅꾸벅 조는 녀석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 특강을 허락한 보스조차도 다리를 이리저리 꼬면서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정작 L처장께서는 책상까지 두드려가며 열변을 토하면서,

"내 말을 알겠지? " 라며 공감을 억지로 유도하셨다.

내가 보기엔 부서원들의 "예"라는 말은 영혼없는 답변이었다. 

힘들게 근무하셨던 수십년 전의 얘기들을 꺼집어내시고는

요즈음 이런 좋은 환경에서 젊은이들이 점점 게을리지냐며 뭐라 하셨다. 

십 여년 차이나는 나조차도 동의하기 어려운 사실들을

이 삼 십 년 후배들이 공감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머리속으로는 오늘 업무 결산도 해야하고,

내일 실시되는 프로젝트 기힉 업무 준비 토의도 해야 하는데,

지겨워지면서 잘 듣는 척 하는 것조차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행복에 대해 얘기하시겠다는 말씀을 꺼내시고도

20 여분이나 말씀을 하시더니,

결국 업무시간 종료 벨이 울려서야 특강을 끝내셨다.

부서원들로부터 큰 박수소리가 나왔다. 비로소 마쳤다는 안도감 탓이다.

재미없는 얘기를 듣는것도 참으로 인내가 필요했다.

누군가를 위해 조명이 되어주었다면, 주인공은 무대를 책임을 져야하는데도,

공감하지도 못한 혼자만의 얘기는 아무리 본인으로서는 절실하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소음이 될 수 있다.

정신과 의사가 돈 버는 건 결국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랬나?

의사 면허가 없어서 그런지... 돈도 못받고 힘만 들었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탓인지

어떤 사실을 비유함에 있어 바다와 연관을 짓게 되는 듯 하다.

어려서부터 삶이란 항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항해의 최종 목적지는 사람마다의 가치관에 따라 정의된 유토피아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최근에 책을 읽다보니 유토피아(Utopia)의 어원이

그리스어 'ou'(없다.)와 'topos'(장소)가 합성된 말이라니

인생이란 목적지없이 떠도는 항해의 과정일 수도 있겠다 싶다.

항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는 어릴 적에 참 많이 경험한 듯 하다.

특히나 어느 심하게 바람불던 밤에 아버지를 따라 2.66톤의 작은 배를 타고

피부가 찢겨나가는 듯이 불어대던 그 겨울 바닷바람속에서

그물을 끌어올리던 그 기억을 되살리면 아직도 멀미가 날 정도다.

그런 경험탓인지 인생이 항해와도 같아서

그 험난한 바다위에 떠 있어서야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

참으로 살아간다는 건 위태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이 삶이란 항해의 시작도 그러하겠지만,

부딪치는 수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인연은 당연히 부모님이시다.

엊그제는 부모님께서 상경하셨다.

몇 년 전에 대장암 수술을 받으시고 완치 판정은 받았지만,

수술을 한 병원에서 반년마다 실시하는 정기검진을 받기위해서 였다.

그 병원에서 동생네와의 거리는 한 시간 정도이고,

우리집에서 동생네 집까지도 또 한 시간 가량 더 걸리는 거리라서

서울 오신 김에 아들네 집에 오셔서 며칠 쉬셨다 가시라고 사정했지만,

한사코 거절하시고는 동생네로 가셨다.

아마도 새벽에 일찍 나서서 관장을 해야하기 때문에 

길눈이 어두우신 서울에서 그나마 익숙한 동생네를 택했다지만,

혼자서 아이 둘을 키우는 동생네 딱한 사정을 더 살피시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밤에는 서둘러 일과를 마치고, 부모님을 만나뵈려고 동생네 집으로 향했다.

두어 달 만의 반가움보다 허리가 더 굽어지시고 머리가 더 희어진 것이 화가났다.

오랫만에 서울 나들이인데, 옷도 좀 차려입고 오시면 좋으련만

전형적인 시골노인네처럼 보따리에 이것저것 싸들고 오셨다. 

그 초라한 형색으로 반나절 동안이나 버스와 택시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오신걸 생각하니, 맘이 불편했다.

일하고 피곤할텐데 일부러 동생네를 찾아왔냐며 뭐라하시지만, 딱히 진정성은 없어셨다.

나 역시 피곤을 핑계로 아버지 다리위에 머리를 하고 누웠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누워버렸지만, 평생 처음이었다.

뒷통수로 느껴지는 아버지 다리가 참 앙상했다.

평생을 바닷일로 거칠어진 그 투박한 손으로 내 볼을 쓰다듬으시며,

"에이그. 우리 하경 아범도 흰머리가 많이 났네."

그 말씀을 하시는데, 갑자기 아릿했다.

전형적인 경상도 출신인 아버지께서 애정표현을 하신적은 한번도 없었던터라

언제 다시 이 따뜻한 손으로 내 볼을 다시 만져주실지 싶다.

그러고보니 올해는 두 분 합쳐 연세가 150세이다. 

바리바리 보자기로 싸오신 마른 생선은 비린내가 진동하고,

텃밭에서 가꾸신 고추랑 배추랑 파도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아서 시장에서라면 얼른 손이 가지 않을 듯 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한 시간여 나누다가 두 분을 안아드리고,

용돈 몇 푼 쥐어드리면서 아들 도리를 흉내내는 듯 하여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주말내내 앓았다.

지난 금요일에 아내가 하경이 고등학교로 진로상담을 다녀오고 나서 많이 우울해했다.

아내와 하경이가 만나서는 교실에서 서로 부둥켜앉고서 펑펑 울었단다.

하경이는 자기의 성적 때문에 엄마가 선생님한테 미안해하는게 안타까워서 울었고,

아내는 하경이가 성적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할까를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났단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때만 하더라도 학력고사라는 한방이 있었는데,

요즈음은 내신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수시의 비율이 높고,

수능으로 평가되는 정시의 비율이 낮아지고 있단다.

여기다가 이과와 문과라는 중대한 진로의 갈림길에서 무엇을 선택할지에 대해 

하경이가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빠로서 기껏 한다는 말이라는게 겨우 하경이가 좋아하는 뭐를 선택하더라도

아빠는 언제든지 응원한다는 원론적인 말뿐이라 안타깝기는 하지만,

지금껏 하경이가 너무도 잘해왔고,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고민하면서 성장하는 과정이기에 지나치게 걱정하지는 않아야겠다.

나 역시 하경이가 느끼는 그 절망감을 대학원 시절에 경험했다.

다른 녀석들은 쉽게 공부하는 듯 한데, 죽으라고 해도 성적은 제자리걸음이었고,

수 많은 수식과 영어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까마득해서

대학원에 다니면서 수학 정석 책을 펼쳐보아야 했던 그 패배감은

지금 생각해도 아릿하게 가슴을 저민다.  

아마도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책을 쓴 작가에 대해 엄청난 증오심까지 느꼈던 듯 하였다.

금요일 저녁에 내 마음과 아내의 쓰린 속을 달래고자 아내와 근처 막걸리집에 갔다.

막걸리와 돼지껍질 안주로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서로를 위로하려했는데,

왠걸 돼지껍질이 너무 매워서 눈물을 쏙 뺐고 입속은 얼얼하고, 속은 뒤집히는 줄 알았다.

오죽했으면 돼지껍질을 다 먹지도 못하고, 남겨왔다.

토요일 아침에 눈을 뜨니 몸이 으스스했다.

막걸리의 숙취 기운도 살짝 있어 땀을 좀 빼면 낫겠다 싶어 골프 연습장에 들렀다.

다음주부터 풀 스윙 레슨을 받아야 하는데, 하프 스윙은 왜 그렇게 안맞던지...

오히려 더 짜증만 나서 사우나에 들렀다가 S의 첫째 아들 결혼식에 다녀왔다.

저녁때는 감기 바이러스 녀석이 몸을 망가뜨렸다.

두통에다가 오른쪽 눈을 바늘로 찌르는 듯 아프고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감기에 왜 걸렸을까를 생각해보니, 지난 목요일에 비를 맞으며 달리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오후 늦은 시간이 어떤 젊은 녀석이 운동장에서 달리고 있었고,

Staff인 H 가 초시계로 이 녀석의 달리기 기록을 측정하고 있었다.

300M 트랙을 열바퀴 돌아 12분 30초내에 들어와야만 합격하는 측정이었는데,

내가 운동장에 들어섰을때가 네 바퀴를 도는 순간이었다.

그 녀석의 달리는 속도라면 12분 30초내에 들어오기 힘들어보여서

내가 그 녀석의 앞에 페이스메이커처럼 뛰면서

 "내 발만 보고 죽어라 따라와라"고 독려하며 나머지 6바퀴를 뛰었다.

비까지 맞으면서 달리다보니 힘들었다. 

결국 12분 27초를 달려 이 녀석은 합격을 했고, 결승선을 통과하자마자 큰 대자로 퍼져버렸다.

"감사합니다. 부서장님 아니었으면 절대 못 했을 겁니다." 라며

제대로 숨을 못 쉬면서도 고마워했다.

나름 뿌듯한 기분이 들어 그 비를 맞으며 혼자서 운동장을 세바퀴 더 뛰었더니

결국 사단이 난 것이다.

일요일에 감기약을 먹고, 계속 잠만 잤다.

아내가 어깨랑 등이랑 다리랑 발까지 마사지를 해줬지만,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오후에 뜨끈한 전기매트에서 잠을 푹 자고 나서야 몸이 좀 괜찮아졌다.

아무래도 이젠 20대의 젊은이들과 체력으로 경쟁하는 무리한 짓을 해서는 안되겠다.

남자들만 모이면 얘깃거리가 참 궁하다.

한때는 정치인들과 연예인들에 대한 가쉽거리를 침을 튀기면서 얘기했지만

그 모든것들이 우리들의 관심 여부와는 상관없이

권력과 인기와 돈이 지배하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걸 알아차린 다음에는

재미도 시들해지고, 얘기의 중심에서 벗어나 버렸다.

어쩌면 이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호기심이 줄어드는 탓이 커겠지만,

우리나라 정치라는게 지역색에 편승하여 호불호가 딱 갈리다보니

서로에 대한 편견이 심하고 강한 지역색은 서로 거부감이 들기조차 한다.

연예인들의 얘기 또한 Top-star였던 몇 사람이 지상파 방송을 주름잡았을때야

그들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사가 호기심이 될 수 있었지만,

요즘에는 기획사에서 양식하며 기르는 듯한 아이돌이 단체로 몰려다니고,

워낙에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아서 특징이 없는 듯 하다.

오죽해서면 노출이든 가정사든 갖가지 노이즈 마케팅을 통해서 자신들의 인기를 가늠하려하지만,

4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그런 것에 쉽게 휘둘때는 아닌 듯 하다.

그러다보니, 기껏 돈 얘기인데, 내가 아는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월급쟁이들이고,

아이가 성공하기 위한 3대 요소로 "아빠의 무관심"이 등장할만큼 가정에 무심하다보니,

아이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아이들 얘기를 못하게 되고,

서로 마누라 얘기하는 것도 팔출인 듯 싶어서 안하다보니,

결국 골프와 직장 얘기와 지난 시간들의 무용담이 전부인듯 하다.

특히 최근에는 골프 연습장이 회식 2차의 필수코스로 자리잡았다.

이건 여직원들이 늘어나면서 부적절한 행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조심스러움과

어디에서든 평가에 자유로울 수 없는 조직생활이다보니,

노래방의 그 열기는 이젠 시들한 듯 하다.

하지만, 골프 얘기가 나오면 온갖 은어들과 룰이 난무하다보니,

나처럼 실제 필드를 밟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난감하다.

결국에 휴대폰을 바꾸고 말았다.

지난 토요일에 Y의 결혼식에 다녀와서는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네비게이션으로 사용하던 스마트폰을 휴대폰 거치대에서 꺼내다가 떨어뜨렸는데,

액정이 그만 깨져 버렸다.

화면이 손가락의 움직임을 인식하는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액정 표면에서 작은 유리 조각들이 삐져나와 손가락을 찔렀다.

수리를 받아야 할지를 잠시 고민했지만,

이미 지난달에도 액정을 깨뜨려 12만원을 주고 액정을 교체했었고,

두어 달 전에는 제주도 여행가서도 휴대폰을 떨어뜨려 카메라 렌즈가 파손된 상태라

수리비용이 새로운 모델 구입비용과 비슷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자꾸만 떨어뜨리고 깨버리는 스스로의 부주의함에 화가 났다.

이런 우여곡절 속에서도 Note-2 휴대폰을 거의 33개월을 사용했으니, 

우리나라 평균 스마트폰 교체주기인 3년내 80% 에는 거의 근접하여 사용하긴 했다.

워낙에 기계치라 Ealry Adoter와는 거리가 멀지만,

최근에 휴대폰 바꿀때가 된 것 같아 새 모델을 검색하던 걸 봐왔던 아내는

일부로 깨버린 것 아니냐며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카톡이랑 문자가 많이와서 깨진 액정을 들여다보려니 화가 났다.

아마도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서 더욱 기분이 다운되었는지도 몰랐다. 

결국 잠시 외출을 나가서 가까운 휴대폰 매장으로 갔다.

이미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Galaxy Note-5에 삘이

꽂혀있던터라 어떤 모델을 고를까에 대한 망설임은 없었다.

장기적인 휴대폰 요금제를 알아보던 중에 우습게도 그동안 45요금제를 사용하면서

기본요금을 45,000원을 내면서도 1.1G의 데이터만 사용할 수 있었는데,

최근에 등장한 36요금제는 월 36,000원을 내면서 1.7G의 데이터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통신업체에서는 맨날 전국적으로 LTE 인프라 증설이 완료되었다고 광고하는데,

왜 매달 이렇게 비싼 요금제를 지불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역시 장기 사용 고객은 통신사 입장에서는 호갱이었던 것이다.

휴대폰 단말기 가격더 노트북 가격에 대비해서

이 조그만 스마트폰이 뭐라고 출고가가 아직도 100만원이 넘는다는 것도

판매 업체간 단말기 할인의 자유경쟁을 왜 정부가 규제해야 하는지도 이해가 안갔다.

게다가 깨알같은 글자 크기에 한글같지 않은 어려운 글로 도배를 해두고는

작성해야 할 서류와 서명해야 할 곳을 왜 그렇게 많이 만들어 두는지 모르겠다.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대리점에서 서명하라고 연필로 표시해 둔 몇 군데에 서명을 했다.

단말기를 바꿔서 개통하는 시간은 겨우 1시간여 밖에 안 걸렸다.

기존 휴대폰의 데이터를 카피해달라고 했더니,

연락처 뿐만 아니라 네비게이션의 최근 목적지까지 넘어오는데도

휴대폰 문자는 복사되지 않는다고 했다.

페이앱이란걸 깔면 무선충전 패드를 할인(55,000원-> 5,000원)하는 행사가 있어

스마트폰으로 주문하려니 계속 오류가 났다.

내가 서툴러서 그런가 싶어 젊은 친구를 불러 물어봐도 시스템 오류같다고 했다.

이벤트 행사에 사용자의 UI(User Interface)는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았다.

퇴근해서 아내에게 "사고쳤다."고 했더니, 스마트폰 바꾼걸 단박에 알아차린다.

역시 여자의 촉은 대단하다.

지문인식되는 걸 보여줬더니,

바람피는 남자들이 가장 먼저하는게 스마트폰을 비밀을 만드는 것이란다.

"별 소리 다한다."는 내 말이 끝나자 마자 삐용이 녀석이

내 손가락을 끌어당겨서는 지문인식을 해제한 다음

환경설정에서 지문인식을 화면밀어서 잠금으로 변경해버렸다.

역시 이 녀석도 엄마편이다.

새로운 스마트폰에 아직 적응이 잘 안되고 있다.

어쩐지 어색하다. 이제부터라도 스마트폰 사용에 대해서 자제해야 겠다.

화장실에는 이걸 안들고 가고, 보행중에 보지말고,

휴대폰 케이스를 벗긴 상태로 어디 들고다니지 말아야겠다.

무엇보다도 집에서는 이 녀석보다는 가족과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지도록 해야겠다.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비에 젖어서 찢겨진 플라타너스 낙엽들이 바람에 날려 지저분해 보였다.

국어책에서 배운 詩에서는 플라타나스가 시인의 고독을 대변했다는데,

차가운 가을비 속에서 이파리를 떨군 나무들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러고보니 올해는 변변한 가족 여행도 못하고,

가을비와 함께 이 계절이 사라져버리고 있다는 위기감마저 들었다.   

아내랑 후배 Y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한 시간 반이면 족한 거리를 비가 내리고 주말이라서 두 배이상 걸렸다.

주차장은 왜 그렇게 코딱지만하던지, 주차장에서조차 20 여분을 헤매다보니

막상 결혼식에는 신랑신부가 퇴장하는 시간에야 겨우 도착했다.

신랑 Y는 작년에 근무하던 부서에서 같이 근무하던 후배다.

토요일의 휴식을 이 녀석의 결혼식 참석과 바꿀만큼 친하지는 않지만,

당시에 같이 근무하던 후배들이 결혼식에 많이 참석한다고도 하고,

신랑 Y 또한 내가 꼭 참석해서 자리를 빛내달라고

카톡과 전화로 수차례 요청했기 때문이다.

친척 결혼식이 아님에도 아내랑 같이 결혼식에 참석하게 된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주말에 아내를 혼자 방치하는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실상은 차 타고 결혼식장 가는 긴 시간에 내가 심심했기 때문이었다.

결혼식장은 붐볐다.

신랑신부가 퇴장을 하는데, Y의 후배들이 예도로서 막고 있었다.

예도단들이 신랑 신부가 뽀뽀하도록 만드는거야 너무 식상했지만,

신랑이 장모를 번쩍 안았다가 일어서면서

"장모님, 예쁜 딸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를 삼세번 외치게 하고,

신부가 시어머니에게 하트를 날리며

"어머니, 잘 살께요. 감사합니다."를 삼세번 외치게 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결혼식에 참석했던 후배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나보고 얼굴이 더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인사 치레가 뻔하다. 

지인들과 사진찍는 시간을 이용해서 신랑 Y와 악수로서 축하를 했다.

신랑이랑은 나이차가 있다보니, 신랑 친구들 사진 찍는데 끼여들기 어색해서

아내와 피로연 식당으로 갔다. 뷔페였는데, 빈자리가 없었다.

어쩌다보니 안면도 없는 낯선 사람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야만 했다.

사실 뷔페에서 뭔가를 먹는다는건

음식이 아무리 맛있더라도 꼭 가축이 사료를 먹는 듯한 느낌이다.

수많은 음식들의 유혹앞에서 원초적으로 배부르기 위해 먹는 일,

그러니까 인간사에서 食事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곳이 뷔페인듯 하다.

초밥 몇 개외에는 그다지 손이 안갔는데도 배가 불렀다.

집으로 돌아와서 쓰러지듯이 잤다.

"응답하라. 1998"을 보고나니, 토요일이 너무 무의미하게 지나간다는 아쉬움에

아내와 삐용이에게 영화보러 가자고 했다.

삐용이는 아빠와 엄마가 데이트를 방해할 수 없다며 집에 남겠다고 했다.

인터넷으로 영화 프로를 검색해보니,

"007 시리즈- Spector" 랑 "검은 사제들"이 인기란다.

아내가 폭력적인걸 싫어하다보니, "검은 사제들"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영화의 주제는 퇴마가 어떠느니 하는데, 이런건 전혀 재미없다.

학교 다닐때도 친구들이 유행처럼 퇴마록이나 무협지에 빠져 있는 걸 보고는

도대체 그런 글을 왜 읽는지?

왜 그런 글을 읽느라고 시간을 빼앗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검은 사제들'의 평가에서도

주연 배우인 강동원이 잘 생겼다는 글이 베스트 댓글이였다.

그렇게 심야영화를 봤다.

영화를 잘 만들었다 못 만들었다를 평가할 능력은 없지만,

퇴마니 귀신이니 하는 허무맹랑한 얘기가 흥미가 없어 잠시 졸았다.

아내는 나름 재미있었다고 했다.

영화보고 돌아와서는 맥주 한 병을 둘이서 나눠 마셨다.

그렇게 토요일이 지나버렸다.

정신없이 바빴다.

지난 주에 실시된 검열에서 정비실 예산 운영에서 몇 가지 문제가 발견되었고,

예산 사용의 최종 승인권자이다보니, 취조받듯이 불려다녔기 때문이다.

정비실을 담당하고 있는  C 실장은 내년 초에 정년인데,

업무하러 출근하는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업무 외적인 여가 활동에 적극적이다.  

지역 내 국궁 회장 직책을 맡고있어 사내의 이사진들과 안면이 있고,

할리 데이비슨이라는 외제 오토바이를 타는 모터사이클 동호회 회원이기도 하다.

직책상 정비실을 통제하는 때 이 직책을 내가 맡자마자 매일이다시피 나를 찾아와서는

주변 이사진들과 관계를 맺는게 중요하다며, 같이 회식하고,  스크린 골프장에 가자고 종용했다.

하지만, 내가 워낙에 그런 형식적인 모임을 싫어하다보니 끝끝내 거절하고 말았다.

업무상 정비실 운영에 문제없다고 큰소리치지만,

실상은 업무를 지시하러 사무실로 찾아가면 대개 자리를 비웠다.

그나마 정비실의 실무자들이 부지런하다보니 근근히 업무가 빵구나지 않는 정도였다.

보스조차도 C 실장이 고등학교 선배라서 다소 껄끄러워했고,

그럼에도 C실장은 은 늘 누구 누구 유력인사와 친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다.

사생활 측면에서도 다소 안 좋은 소문이 있기도 했으나,

나와는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다.

직책상 C 실장을 통제하는 입장에서는 스스로 알아서 업무에 집중해주길 바랄 뿐

그동안의 근속 년수와 나이를 생각해서 나무라지를 못했다.

그런데 지난 주 예산 감사에서 1,500만원 정도의 자금을 전용한 것이 발견된 것이다.

개인적인 용도로 횡령하진 않았지만,

수리부속이나 정비 목적으로 집행해야 할 예산을 완제품 구입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젊은 검열관이 지적을 할때도 C실장은 뭐 그런걸 가지고 그러느냐?며 적반하장으로 따졌고,

이게 검열관을 더 자극해서 꽤심죄로 딱 걸려버린 것이다.

꼬장꼬장한 검열관은 올해 집행된 모든 예산 관련 서류철을 뒤져서는 따지면서

C 실장을 징계하고 말겠다며 계속 으름장을 놓았다.

나에게 부담을 주기 싫었던지 P실장이 직접 보스를 찾아가 해명했지만,

보스 역시 나를 불러서는 내 선에서 어떻하든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보스 역시 상급자와 규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서운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검열관에게 무마를 부탁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것 같았다.

오후에 C 실장이 날 찾아와서 대책회의를 하는 중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살짝 짜증내는 나를 보며 내가 참 어려운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에 만났던 후배 녀석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 형은 좀 어려워요. 아우라가 느껴다기보다는 쉽게 다가서기 힘들었어요.

그거 알아요? 대학교때 형보다 5살 많은 P형이랑 기숙사에서 생활했던거요.

그때 P형이 형보다 겨우 한살 어린 저한테는 막말을 하면서도

형한테는 함부로 말을 못하고 엄청 어려워했던 거 말예요." 

돌이켜보니, 당시에는 그랬던 것 같다.

가난한 대학생으로 아르바이트와 학점에 메여있다보니, 피해의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서는

고슴도치처럼 적의와 분노가 가득했었다. 혹시 누군가가 내 자존심이라는 영역을

건드리지 않은지를 감시했었고, 늘 가시를 세우면서 경계했던 듯 하다.

점차 나이가 들면서도 가시도 무뎌지고, 성격도 많이 유순해졌다 생각했는데,

남들이 보기엔 아직도 나의 본성이 여전한가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검열단장이 학교 선배님이다.

가끔 탁구장에서 파트너로 묶여 시합을 하기도 하는데, 대쪽같은 분이라 고민이다.

마침 저녁에 동문 모임이 있는데, 사정사정해야 하나 고민이다.

지난 밤에는 회식이  있었다.

이번 금요일에 우리 부서를 떠나는 P를 위한 위로의 자리였다.

P는 18개월을 우리 부서에서 근무했는데,

안타깝게도 마지막 승진 기회였는데 실패하였다.

진급이란게 내가 결정하는게 아니라서 섣둘리 P의 실패이유를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상급자로서 같이 근무해보니 친화력과 충성심은 흠잡을데 없지만,

사고방식이 단순해서 주변을 두루 살피는 능력이 조금 부족한 듯 하다.

만약에 누군가가 P와 다시 근무하겠느냐고 물어온다면 "글쎄"다.

회식장소는 P가 횟집에 가자고 제안해서 W수산으로 정했다.

회식비용은 늘 부서장이 전담하기 때문에 몇 년 전 만해도

부서장의 입맛에 따라 회식장소가 정해졌는데,

요즈음은 부서원들의 다수결 결정을 따라가야만 하는 시대다.

회를 좋아하지 않지만, 주인공의 의견이니 어쩔수 없었다.

지난 달에 부적절한 행위로 우리 부서를 떠났던 L까지 10명이 모였다.

광어회 3개와 소주와 맥주를 각 5병씩 시켜 소맥을 말았다.

회값이 약간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스끼다시 아니 기본찬이 많다.

내 입맛이야 워낙에 아이같아서 생굴이나 조개는 P에게 양보했다.

이런 맛있는 걸 왜 안먹느냐며 놀라워한다.

이유는 없다. 몇 번을 먹으려 해봤지만, 물컹거리는 그 느낌이 별로이기 때문이다.

소주도 맥주도 한 병이 5,000원이다. 비싸다.

기본찬으로 나온 바싹한 튀김은 삐용이가 참 맛있어 할 것 같다.

아내가 스시랑 광어회를 무척 좋아하는데...

혼자서만 맛난 걸 먹는 것 같아 미안하다.

내 입맛은 광어회보다는 매운탕이 적격이다.

MSG로 맛을 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뼈 사이 사이에서 발라먹는 고기맛과 국물맛은 끝내준다.

공기밥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 P가 마지막 건배를 했다.

전출 회식자리의 건배사라는게 대개 천편일률적이다.

"바쁜 가운데 이런 자리를 함께해주신 00장에게 감사한다.

함께 고생했던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나로 인해 아쉬웠던 일들은 잊어달라.

몸은 떠나지만, 마음은 여러분과 함께다.

우리 부서의 영원한 발전과 각자의 건강을 기원하며, 건배!"

P가 부서장에 대한 감사의 인사멘트가 없다.

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부서장에 대한 감사의 멘트가 없다는게 살짝 섭섭하긴 하다.

진심이었는지 실수이었는지 모르지만, 업무와 관련하여 그동안 많이 혼나서 마음에 없기 때문이다.

회식비용은 30만원 조금 더 나왔다.

회사 법인 카드를 낼지 개인 카드를 낼지 살짝 망설여졌다.

부서원의 단합을 통한 업무 효율성 증진이라는 명목이지만,

실상은 먹고 마시는 것에 회사 카드를 사용하는 것임에 꺼림칙했다.

하지만, 부서원들끼리 참석한 회식이므로 회사 규정상 하등의 문제가 될 건 없다.

여러번 망설이다가 회사카드를 내밀었다.

택시를 타고 가자는 부서원들을 이끌고, 2Km를 걸어서 돌아왔다.

2차로 맥주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고싶은 마음이 살짝 땡겼지만,

Staff들의 표정과 몸짓을 보니 참석 가능한 사람이 딱 반반이었다.

누구 하나라도 억지로 회식을 강요할 마음은 없어 그대로 해산했다.

겨우 9시인데 회식을 마친 것이다.  

솔직히 이런 회식의 비용대비 효과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본다.

'회식 비용이 부서원의 응집력과 업무 효율성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이런 논문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회식보다는 업무와 작은 인연으로 더 기억에 남았으면 좋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