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核물리학자 이휘소 박사와 朴正熙♧시사매...


[核물리학자 이휘소 박사와 朴正熙]


한국 核개발 참여 과정의 세계적인 핵물리학자 이휘소박사...

10년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게 되는 계기에 새삼 이휘소 박사를 다시 생각해 보면서,
너무 아까운 인재에 가슴이 아리기도 한다.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


이휘소 박사는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고교 2학년 재학 중 검정 고시를 거쳐 서울대 수석 합격,

화공과 2학년 재학 중 도미, 마이야미대학 물리학과로 편입,

피츠퍽대학 석사,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27세에 프린스톤 연구소 위원,

그 당시 미국에서 10명에 꼽히는 물리학자가 되었고, 28세에 뉴욕주립대학 정교수,


30세에 시카고대학 교수 겸 페르미연구소 물리부장으로 취임,

명실 공히 세계 핵물리학자 중 1인자로 부상했다.
74년에 방한, 서울대에 AID 차관에 의한 과학연구소를 설립해 주었으며,

77년 주한미군 철수가 시간문제로 대두되자 조국에 장거리 유도탄과 핵무기 개발 원리를 제공하고

같은 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1962년 국제 고에너지회의에 미국대표로 참석할 정도의 이휘소 박사는 미국을 대표하는

핵 과학자 10명 속에 끼이게 되었다.
외국인으로 거기에 든 예는 과거에 없었고, 아직 국적이 "한국인"으로 되어 있는데도

거기에 낀 것은 특별한 예외에 속한 것이었다.


국제 고에너지회의는 이탈리아의 프리에스트에서 7월 15일부터 45일간 계속되었는데

미국의 핵 과학자 10명이 거의 행사를 주도하였다. 특히 이휘소가 프리스톤 연구소에서 발표한

논문 4개가 회의의 중심 과제가 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백 여 명의 학자 중 이휘소가 가장 젊었다.
당시 이휘소는 핵의 이론과 소립자의 단위와 그들의 생명의 기간 그리고 그 생명이 다른 것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강연을 했고, 세계 석학들 전원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박수가 끝나자 이휘소는...

"저는 미국 국민이 아직 아닙니다.
저는 한국이라는 가난하고 분단된 국가에서 태어나 미국에 유학 중인 사람입니다.
제가 국적을 언제인가 옮길 줄은 모릅니다만,

핵을 만들고 핵을 이용하는 것은 일부 강대국의 전유물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핵을 저개발국가의 복지에도 혜택을 주어야 합니다.

핵을 전쟁무기로 생각하는 인식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휘소의 이 말에 모두 또 감격했다.


회의에 참석한 전원이 기립박수를 하였다. 기립박수를 받은 사람은 젊은 이휘소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 국내 신문에도 이휘소가 국제물리학 회의에 미국대표로 참석한 기사가 일제히 나왔었다.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보는 박사학위 시험결과도 전체 평균 93점이었고,

차점 합격자의 평균 71점인 것을 계산한다면 엄청난 차이이다.
펜실베니아 대학 역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고, 더구나 물리과 지망생 중

미국 전 대학 역사에도 없는 점수라고 말한다.

 
아인쉬타인 박사가 일하던 곳의 프리스톤 고등연구소의 프레이즈 박사가 찾아와

대담을 요청할 정도였다.

귀하의 성적은 펜실베니아 대학 뿐만 아니라, 전 미국의 물리과 박사학위 지망생 중에서

역사 이래 가장 뛰어난 성적이라는 게 저희 연구소가 검토한 결과입니다.


특히 귀하의 시험지를 검토한 결과 새로운 이론의 전개나 학설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본 연구소의 검토 결론입니다.
더구나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으로서 이런 성적을 올릴 수 있는 비결이라도 있는가'고 묻는

이휘소와의 대담은 생략하고...


프레이즈박사는 정중히 이휘소를 연구소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초빙을 하면서,

귀하를 만난 것이 영광입니다.
더구나 저희 연구소에 오시게 된 것도 환영 합니다. 귀하가 미국에 있는 것도

참으로 다행인 것 같습니다.


이휘소는 1960년 1월 프리스톤의 정연구원으로 들어갔다.

특히 이휘소의 담당교수인 크라인 교수가 기뻐해주었다.
세계 석학의 집결지인 프리스톤 연구소에 30세도 안된 사람이 정회원(당시 25세)이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박대통령과 이휘소...


핵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 꼭 필요했던 이휘소 박사, 박대통령이 보낸 편지...

< 이휘소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박사님을 뵈 온지 벌써 4년이나 되었 습니다.
그 동안 박사님의 소식은 이 곳에서 저도 자주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박사님께서 본인이 선포한 유신에 반대한 것 때문에 저대로 많은 고민도 했습니다.


언제까지 대통령직에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본인이 대통령직을 그만 두느냐 계속하느냐 하는 것은, 모든 것은 국방에 달렸다고 사료됩니다.
지금 나라는 어지렵고, 국방은 허술하고 언제 공산화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대통령직을 내놓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박사도 아시다시피 우리 정부에는 한 마디의 상의도 없이 이미 미군철수가 시작 되었습니다.

미사일 부대는 이미 철수를 끝낸 단계이고, 지상군 17,000명이 철수를 시작 했습니다.

이것은 월남에서와 같이 한국이 공산화 되어도 좋다는 전제의 신호이기도 합니다.
이제 얼마후면 한국에 남아있는 핵도 철수할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본인도 미국정부 측에 몇 번 자제를 호소하고, 부탁도 하여 보았지만,

더 이상 구걸하는 것도 추한 꼴이 되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도 무엇하지만,


그래도 애원해서 들어줄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본인은 어떠한 일이라도 할 각오입니다.
이박사님도 아시다시피 본인이나 한국정부가 요구해서 들어줄 단계도 이미 지났습니다.
가능성도 없는 구걸 행각으로 국가의 이미지만 손상을 보는 추한 모습을 또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언제인가는 이런 때가 오리라는 생각으로 박사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독자적으로

유도탄 개발과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재미과학자들을 본국에 초청한 것이나 귀국시킨 것도 이런 저의 뜻의 일부입니다.
이 박사님을 초대하거나 모시지 못한 것은 박사님을 초대한다는 것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는 결과나 마찬가지라는 중론에 못 이기어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인은 사실 박사님의 능력을 추앙하고 박사님이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에

무한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그러나 조국은 위태로와졌고 사정은 급박하여졌습니다.
이미 카터와의 싸움은 시작이 되었고, 여기서 비굴하지 않고도 우리는 승리해야 할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비굴한 기운만 보이면 깔고 뭉게는 묘한 도덕정치를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의존하던 시대에 종막을 고할 때라고 사료 됩니다.


우리 자체가 독자적으로 미사일 개발, 핵무기 개발, 인공위성 개발까지 해서

감히 누구도 우리를 넘볼 수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다시는 6.25의 쓰라린 경험 같은 것을 맛보지 않게,

우리 백성들이 전쟁으로 살상되는 비극이 다시는 없도록 이 박사께서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이휘소 박사님, 조국을 건져 주십시오.
74년엔가 박사님을 처음 뵈었을 때 저는 이 박사를 보호하기 위하여는 6

0만 대군이라도 동원 하겠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진심입니다.


우리 민족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는 지금 이박사의 마음에 달리어 있습니다.
그 동안 재미 물리학자들의 협력을 얻어 미사일개발부터 서둘렀고, 또 시험도 해 보았지만,

하나같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이박사님의 힘이 필요할 때입니다. 박사님이 처한 위치가 어떠한 지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박사님께서도 조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눈뜨고 보고만 계시지만은 아니할 것입니다.

이박사님께서 조국을 위해, 한 번 일어서 주십시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상황 앞에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절대 위기의 상황에서

감히 이렇게 박사님께 애원합니다.
박사님의 건강과 가운이 길이 빛나기를 엎드려 비옵니다.

1977년 3월 18일
대한민국 대통령 박 정 희 배상>

편지는 이렇게 끝나있었다.
이휘소는 편지를 읽으면서 참담한 심경 속에 사로 잡히었다.
암담한 기분이었다.
이휘소는 그날 (1977.3.20) 일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조국이 나를 필요로 할 때라는 절박한 내용 이었다.
내가 핵을 공부하고 연구한 것은 처음에는 적성에 맞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나의 목적은 핵연료를 이용한 인류의 구원이었다.


핵에너지를 이용한 자원의 개발, 자원의 새로운 창조는 무한히 열리어 있다.
나는 지금까지 여기에 내 생애를 바치었다.
또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


그러나 조국이 공산화되거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처할 위험에 처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아니, 지금 조국이 내가 겪은 6.25나 그보다 더한 비극의 문턱에 있다고 판단 되었을 때,

내가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미국은 월남에서 손을 떼었고, 또 한국에서도 손을 떼고 있다.


명백한 사실은 조국이 위험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이다.
미군 철수...
조국의 공산화...
이런 것을 보면서 핵을 자원의 개발에만 목적을 두었던 나의 신념이 흔들린다면...
그것은 잘못된 판단일까?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조국에게 내가 할 수 있는 핵개발의 원리를 제공한다면...
그것이 조국을 지키게 하는 힘이 된다면...
비록 박대통령이 유신을 철폐하지 않을 경우라도 나를 낳고 나를 길러준 조국의 현실을

내가 배반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죽는다.
내가 죽음으로 조국을 살릴 수 있다.
정말 그렇게 해야 하는 걸까?


내가 죽어 조국이 조국으로 남고,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와 형제, 친구들을 구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해야 되는 것일까?
하늘은 나에게 마지막으로 너만이 지금 너의 조국을 구할 수 있다는 명으로

나를 이 자리에 서게 한 것일까?


조국은 나에게 너는 너의 능력을 이 때에 쓰지 않으면 너는 평생을 후회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살신성인... 견위치명... 멸사봉공... 진인사 대천명... 나의 운명...

어머니. 아내, 아이들, 그리고 형제들...


하늘이여... 무엇이 참다운 삶이고 내가 지금 어떤 행동을 하여야 하는가를 안내하여 주소서.>

이 책을 읽으면서 박대통령과 이휘소박사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박대통령의 두번째 편지...



< 이휘소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지난 번 편지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무례한 것 여러가지 용서하십시요.
제가 박사님께 편지를 띄운 후 이십일 동안 미국은 저나 한국정부에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미사일부대 완전철수에 이어 지상군 17,000여명을 철수했습니다.


주한미군은 해체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박사님께서 지금이라도 귀국하여 주십시오.

박사님이 한국에 계시다면, 미국은 그렇게 함부로 하지는 못 합니다.
박사님의 귀국만이 조국을 구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시간은 절박하고 상황은 급박하여졌습니다.
다시는 미국측에 비굴할 수도 없고, 비굴하지도 않겠습니다.
박사님, 다시 청하오니, 귀국하여 주십시요.

1977년 4월 8일
대한민국대통령 박 정 희 배상>

이휘소는 하얗게 밤을 새웠다.
그리고 스케줄을 더듬어 보았다.
4월 8일 하바드 대학특강, 5월 20일 동경제대 학술회의 참가 등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완성단계에 있는 「히고스 입자에 미치는 강작용의 영향」이란 방대한 논문도

며칠 내로 마쳐야 한다.


이휘소는 광적으로 논문에 매달렸다.
이 논문은 특히 Dimuon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Quigg Thacker와의 관계를 명쾌하게

논리적으로 전개한 논문이다.
4월 25일 탈고를 끝낸 이휘소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하버드 대학에서의 특강을 끝내었다.


그리고 그는 조용한 마음으로 5월의 동경대학에서 있을 학술회의를 기다렸다.

1977년 5월 15일, 이휘소는 시카고 변두리에서 외과의 개업을 하고 있는 김 박사를 찾아갔다.

이휘소는 김박사에게...
"사실은... 의논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휘소는 김 박사에게 솔직히 그 동안의 상황을 털어 놓았다.
그리고 조국의 현실과 북한이 가지고 있는 미사일의 성능까지 설명했다.
북한은 소련에서 수입한 사정거리 50Km가 되는 미사일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었다


50Km라면 휴전선에서 서울은 물론 수원 인천까지 미치는 거리다.
휴전선에서 한강다리 전부를 파괴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분이다.
그럴 경우 무기가 없거나 상대에 못 미치는 무기를 가지고 덤빈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미군은 한국에서 철수를 이미 시작했고 다시 미국에 사정하고 애걸하는 것은

한국정부에서도 할 일이 아니며, 그런 꼴을 이휘소도 보고 싶지 않다.
74년에 귀국했다가 박대통령의 부탁으로 당시 미국 내에 있는 과학자들에게 주한미군 철수정책을

시정하여 달라고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하고 찾아다니기도 한 나로서도 다시 그럴 수는 없다.
이휘소는 대강 이런 설명을 하고 투명용지에 쓴 서류를 내밀었다.
가로 10여 센티 세로 4센티 정도로 밀봉이 되어 있는 문서였다.
그것은 이휘소가 따로 정리한 것을 다시 50분의 1로 축소하여 만든 정밀하고 치밀한 계산서였다.
"이것을 다리의 뼈 속에 넣어 주십시오."
"건강에나 몸에는 지장이 없겠지요?"
"얼마 동안은 지장이 없겠습니다만..."
"박사님이 완벽하게 처리하여 주십시오."
김박사는 침통하게 이휘소를 바라보았다.

김박사가 만류한다고 이휘소가 자기의 결심을 포기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자기를 찾아온 것도 평소부터 믿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이휘소가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이 항상 교포 사이에는 긍지와 자랑이었다.
김박사는 다른 의사와 간호부까지 출입을 금지시킨 가운데, 이휘소의 다리에 마취주사를 꽂았다.
살이 베어지고...
소독이 된 서류를 안치하고...
수술은 생각보다 빠르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휘소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휘소가 발표한 「히고스 입자에 미치는 강작용의 영향」은 물리학계에 또 다른 파문을 일으키었다.

살람 교수(78년 노벨상 수상)는 물리학에 새로운 경지의 논문이라고 극찬했고,

세계의 핵과학자들은 다투어 이휘소의 논문을 구하려고 하였다. 


1977년 5월 19일 동경에 도착한 이휘소...


다음 날 발표할 학술논문을 정리하고는 한국 청와대에 전문을 쳤다.
"5월 21일 PM11시 정각 나리다 공항 대기"
나리다 공항 KAL 안내소에는 몇 명의 안내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휘소가 비행기에 오르자, 바로 출발하였다.
한 시간이 좀 지난 후 김포공항에 내리자 바로 대기하고 있던 헬리콥터에 올랐다.
헬기는 청와대 정원에 내려 앉았다.
박대통령이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고맙소, 이박사"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었다.
바로 지하실로 내려간 이휘소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사 두 사람의 집도로 수술이 시작 되었다.

수술은 간단히 끝났다.
대통령은 이휘소의 다리 속에서 빼어낸 겉에는 피가 번진 문서를 받고 눈물을 흘렸다.
"이박사... 고맙소... 이박사!"
대통령은 그 피가 뭍어 있는 밀봉된 문서를 얼굴에 갖다대고 다시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휘소는 바로 헬기를 탔고, 또 지체 없이 비행기에 올랐다.
다음 날 이휘소는 동경제대에서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강의를 했다.
1977년 5월 27일, 미국에 돌아온 이휘소는 매사에 더 적극성을 보였다.
연구소에서의 역할도 더욱 활발했고 대학에서의 강의도 가장 충실한 교수로서,

이휘소는 미국과학계에서 가장 능력있고 존경받는 인물로 공인되어 있었다.
가정에서도 그는 더욱 철저하게 아내 마르안느(중국계 말레이지아 태생인 미국인),

아들 천, 딸 안에게 정성을 다했다.


1977년 6월 16일 콜로라도주에 있는 국립과학 연구소에서 초청강의가 있었다.
가족과 함께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아내와 아들, 딸을 뒤에 앉히고 천천히 차를 몰았다.
페르미 연구소에는 이휘소에 딸린 전문기사가 있지만 웬만한 일에는 이휘소가 직접 차를 몰았다.
시카고 교외를 지나 일이노이 주에 진입 하였을 때, 반대편에서 오는 트럭이 별안간 중앙선을 넘어

이휘소의 차 정면으로 돌진하였다. 

운전대에는 어떤 흑인이 타고 있었고, 이휘소는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이휘소의 차는 주행선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선을 넘어 오더라도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트럭은 100m나 되는데서 부터 정면으로 이휘소의 차를 향하여 돌진하였다.
차의 앞머리가 부서지고 이휘소는 쓰러지고 마르안느, 천이 안이는 삽시간에 일어난 사건에 정신을 잃었다.
마리안느는 직갑적으로 아~ 소리를 지르며 상대방 흑인의 운전솜씨가 의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휘소의 차를 받은 차는 쏜살같이 도망쳐 버리었다.
차가 정지하고 경찰이 오고 이휘소를 차에서 끌어내고...
페르미 연구소에 비상벨이 을리었다.
이휘소의 차에 설치된 긴급 벨이었다.
FBI, CIA에서 페르미 연구소장에게 긴급전화가 걸려왔다.
"이휘소 교통사고로 사망... 상대는 50대 후반의 흑인... 도주했음"
미국 국무장관 실에도 비상벨이 울리었다.

'이휘소 사망...'
FBI, CIA 요원이 삽시간에 주위 400km의 도로를 감쌌다.
그러나 어찌된 것인지 범인에 대한 소식은 전연 발표하지도 않았다.
아니 어떻게 부딪쳤으며 어디가 어떻게 손상되어 죽었는지 조차 발표하여 주지 않았다.
"이휘소 사망..."
UPI, AP, 로이터 통신으로 세계 언론계와 각국 대사관으로 속속 전달되었다.


밤 11시 30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 있는 긴급 벨이 울리었다.
"이휘소 사망..."
박대통령은 전화 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전화통을 창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박대통령은 지난 번 밤 1시에 청와대에서 잠시 이휘소를 만났을 때 이미 죽음까지도 각오한

그의 눈빛을 읽었었다.
아! 죽음을 각오하고 말없이 다리 속에 숨겨온 피투성이의 메모지를 넘겨주던 이휘소...

박대통령은 비서실장에게
"당장에 미국과의 단교를 선언해, 그리고 국내에 있는 미국 놈들을 전원 좇아 버려..."
"무슨 일이거나 그렇게 해... OOO들..."
"이휘소가 죽었습니까? 각하?"
"죽은게 아냐. 죽였지."
"누가 죽였습니까?"
"미국이 그랬지, 그 새끼들 청와대를 24시간 도청하지를 않나?"
"이휘소는 미국 CIA에서만 24시간 감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련에서도 인공위성으로 이휘소를 24시간 감시한다고 들었습니다.
북한에서도 이휘소 때문에 신경을 쓴다는 정보도 있고..."
"어쨋거나 이휘소는 미국에서 죽였어.
아니, 설령 미국에서 죽이지 않았더라도 보호를 해야지, OOO들...
도덕정치를 한다는 놈들이... 그리고 눈앞에 있는 범인도 안 잡았다는 거야."
"미국대사께서 온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쫓아버려...쌍놈의 새끼들...그리고 내일 아침 내가 직접 미국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겠네."

이튼날 박대통령은 직접 나타나 미국 대사를 불러 항의하고, 내외기자를 불러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미국은 한국의 청와대를 24시간 도청하며, 마치 한국을 식민지시하고 있다.
주권국가로 한국을 대접하는 것도 아니고 전정한 우방으로 대우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다시 미국에 애걸하지도 않겠거니와 미국과 국방까지도 협상하지 않겠다."
국방까지도 협상하지 않겠다는 박대통령의 발언은 비상한 충격을 주었다.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이미 미사일부대 완전 철수, 지상군 2만 여명 철수...

연말까지 전 미국 철수 예정... 이렇게 하는 국가를 믿고 국방을 의논할 수는 없다.
미군이나 소련이 가진 무기를 우리도 가지면 된다."

라고 청와대 국무회의에서 공공연히 말하곤 했다.
이휘소의 장례식이 끝나고, 물리학자들 반년만 더 있다 죽었어도 노벨상을 타고 죽는 건데...

이휘소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두 달 후에 박대통령은 보국훈장을 수여했다.
수상식에는 이휘소를 대신하여 이휘소의 어머니가 받았다.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어머니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히며

"참 훌륭한 분이었는데... 너무 훌륭한 분이었는데... 너무 아까운 분이었는데..."라고 말하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이휘소가 박대통령에게 유도탄 및 핵 제조개발 원리를 넘겨주고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를 전후하여

미국의 원자력정책은 급전환했다.
핵 관리의 엄격한 체제구축, 우방국에 대하여 한국과의 핵 협정 파기 등을 강력히 요구했을 뿐 아니라

카터는 한 술 더 떠서

"한국은 인권탄압을 중지하고, 긴급조치를 즉각 해제하고, 독자적인 핵개발 추진을 바로 중지하라"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박대통령은 이러한 카-터의 요구에

"청와대를 24시간 도청하며,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주한미군을 데려가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지 않다.
카터는 근본적으로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으로서 도덕정치를 하는 사람이다"라고 응수했다.
한국과 미국은 상호의 신뢰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거기다가 박대통령은 감정적인 발언마저 서슴없이 해버렸다.
"국가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

그리고 핵확산금지 조약도 자기들은 다 만들어 놓고 남의 나라보고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패권주의 사상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다."
박대통령의 이러충격적인한 발언은 카터에게도 것이었다.
카터는 그런 박대통령에게
"박대통령은 반체제 인사를 즉각 석방하라,
그리고 핵무기개발을 중단하지 않으면 2억9천2백만 달러의 미수출입은행 차관약정을 파기하겠다."

라고 응수했다.

이러한 한 미간의 대립은 박 대통령에게 유도탄 개발과 핵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했다.

박대통령이 하도 야단이니까 한 측근이 핵 공장을 비밀리에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하자

"내가 다 알아서 하고 있어, 관여하지 말게, 곧 돼, 그것만 되면 대통령직을 그만 두고

영남대학에나 내려가 있겠어."

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한국국방과학연구소>에서 합동으로 제작하는

유도탄개발과 핵개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하여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직접 전화로 확인하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예고없이 들리어 연구원들과 종사자들을 격려했다.
박대통령의 집념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박대통령은 집무실에 앉아 한가할 때면 먼 하늘을 바라보며 이휘소의 영상을 더듬었다.

다리를 베고, 뼈 속에서 메모지를 내 주던 모습...

그 피투성이의 메모지를 받아 들고 감격하였던 대통령 자신의 모습...

이휘소가 차에 깔려 죽는 영상...
지금까지도 의문의 죽음에 한 마디 변명도 없는 미국...

박 대통령은 이제 이휘소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이휘소가 내어 준 메모지대로

다 실험을 거쳐야 할 책임을 느끼었다.

유도탄개발과 핵무기개발은 외국의 지원 없이 독자적인 기술과 자원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박대통령의 열성에 감격한 과학자들과 600여명 직원의 협조에 의하여 해결되곤 하였다.

어려움이 산재하여 있었지만... 핵분열물질의 생산과 핵탄두의 운반체 개발 등이 문제였다.
미국은 물론 다른 나라들도 한국과 핵 협정을 맺으려 하지 않았고 맺었던 핵 원료협정도

미국의 압력에 의하여 중단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막막한 며칠이 지나면서, 다시 이휘소의 메모를 펼쳐 보았다.

<실험용> 원자로를 대체해도 좋다는 메모를 보는 순간, 연구실의 분위기는 벼란간 달라졌다고 한다.

이러한 어려움은 몇 번씩 반복되었지만 그 때마다 이휘소의 치밀성에 감탄했다.

이휘소는 천만 분의 일도 실수할 수 없도록 치밀하고 정확한 계산법과, 만약의 경우를 우려한

모든 준비물을 메모지에 준비하여 놓고 있었다.

1978년 8월 26일 O O기지에서 한국국방과학 연구소와 한국핵연료 개발공단과 공동제작한

중장거리 유도탄발사 실험이 있었다.

과거에 몇 번씩 실패한 경험이 있는 박대통령의 심정이나 과기처장관, 또는 거기 모인 사람들은

초조와 기대 섞인 착잡한 심정 이었다.
첫 번째 대전차로켓 (3.3인치 로켓을 다시 개발) 실험은 성공이었다.
두 번째 다연발로켓 (28연발 사정거리 20km) 실험도 성공 이었다.
세 번째 중거리로켓 (사정거리 50km) 실험발사도 성공이었다.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소련제 미사일의 사정거리와 같은 수준이었다.
이것을 우리의 기술만으로 개발한 것이다.
마지막 관심의 초점이었던 장거리 유도탄 발사실험도 성공이었다.
사정거리 150km, 유효사거리 350km로 북한 전역은 물론 소련과 중공의 일부지역까지 영향권이

미치는 것이었다.

이 성능은 미국이 개발한 최신 장거리유도탄 나이키 미사일보다 성능이 우수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외국의 도움없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의 유도탄 보유국이 된 것이다.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장거리 유도탄을 순수한 우리의 기술로 개발한 것이다.

박대통령은 마지막 장거리유도탄 발사 실험마저 성공하자 너무 너무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너무 감격하고 있는 박대통령을 바라보던 과기처장관, 국방장관, 관계 과학자들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박대통령은 임원들의 노고를 일일히 치하하고 차에 올라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박대통령의 머리 속에는다시 이휘소의 순수하고 맑은 눈동자의 영상과 어울려 이휘소의 죽음을 생각했다.

이휘소의 희생과 박대통령의 눈물겨운 나라사랑을 새삼 알게 되면서,

그 두 분이 살아있다면... 경제나 모든 것에 미국에 이끌려 다니지 않는,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한민국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다.

다음날 미국을 제외한 소련, 중국, 일본, 프랑스, 영국, 서독은 물론 홍, 상가포르 등

전세계 신문의 일면 톱기사는 하나같이

<한국 장거리 미사일 발사 성공 - 한국에서 핵무기개발은 시간문제>라고 다루기 시작했다.
특히 소련의 <적성>지에서는 전면 톱기사로 다루고 사설까지 동원해 염려스런 사태라고 논평하였다.

중국, 일본, 홍콩, 프랑스에서도 해설과 우려를 표명하였다.

세계가 경악과 공포의 분위기에 휩싸인 것이다. 다만 미국만이 침묵했다.

침묵한 것이 아니다.

미국정부의 훈령을 받은 미국대사 '스나이더'는 과기처장관을 자주 방문 했고,

박대통령에게 강력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박대통령은 아예 미국대사와의 면담마저 거절했다.

분위기는 냉냉함을 넘어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박대통령은 집무실에 앉아 몇 번이고 독백을 다짐했다.
"이제, 이휘소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도 중단할 수 없다.

지금 의존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면,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이휘소도 남에게 의존만 하면서 눈치만 보는 조국을 볼 수 없어 죽을으로써 자립의 기틀을

우리에게 남긴 것이다."

박대통령은 이휘소를 생각할 때마다 새로운 용기와 결의를 다짐했다.

박대통령은 이휘소의 영상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카터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상황에 강렬한 쐐기를 박기 위하여 1970년 한국을 방문했다.

일본에서 있었던 선진7개국 정상회담에 참석하고 온 것이다.
2박3일의 예정으로 방문한 카터는 의전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도착성명도 없이

밤8시 56분에 트랙에서 내리자 헬기로 동두천에 있는 주한미군사단 병영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다음 날 그는 한 국가의 대통령으로는 걸맞지 않게 팬티바람으로 미군사병들과 조깅을 했다.
이것은 박대통령이나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무시한 행동으로 보였다.

6월 30일 청와대를 방문한 카터는 인권탄압 완화, 긴급조치 해제, 한국의 핵개발 추진 중단을 요구했다.
박대통령은 이러한 카터의 요구를 즉각 거절, 일축해 버리었다.

양국관계는 파국에 직면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살벌했다.
"한국의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은 세계 핵확산 금지법에도 저촉되는 것이 아닌가?"
"당신의 국가, 미국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우리 한국이 핵무기를 만드는데 못 만들게 하는 것은 패권주의 발상이 아닌가?"

박대통령과 회담을 끝내고 미 대사관에 도착한 카터는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15분 이상이나

차 속에서 보좌관들과 회담을 했다.

극비의 긴박한 지시를 내리는 분위기다.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주한미군철수도 일시 중단되었다.

대표적인 이유는 북한의 전쟁도 억제, 소련의 태평양 군사력증강 등을 들었으나,

한국의 독자적 핵개발추진을 포기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같은 해, 1979년 10월 26일 박대통령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청와대 별실 궁정동 지하에서 죽었다. 김재규는 정말 미국 CIA 요원이였을까?

한국의 핵무기개발을 저지하기 위해서 미국은 김재규를 희생양으로 삼을 것일까?

당시 건설부장관은...

"박대통령이 핵 개발에 대한 집념은 무서웠다.

지금 생각하면 그 집념 때문에 불의의 죽음을 당하지 않았나 싶다."

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휘소의 죽음과 박대통령의 죽음이 다 미궁 속에 빠진 채,

누가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역사의 격류 속에 묻혀져 갔다.

1980년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원자력연구소와 핵개발공단은 <에너지 연구소>로

과학원과 과학기술연구소는 <과학기술연구원>으로 통합되었다.

새로 부임한 전두환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에 새로 당선된 레이 건을 찾아가

한국핵무기 개발중단을 약속하고 댓가로 주한미군의 계속적 주둔을 약속 받고 돌아왔다.

그리고 핵무기를 만들기 위하여 준비한 모든 것은 폐기 처분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이휘소의 이름도 역사의 무덤 속에 파묻혀 버리었다.

글을 마치면서...


제가 이휘소박사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지극히 우연한 계기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저와는 별 관계가 없는 분 (전공이 다른 면에서)이라고 생각하였다가

한 두 사람에게서 반복하여 듣는 동안 점점 흥미를 느끼었습니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 미국을 방문하고, 이휘소박사의 어머님을 10여 차례 방문하고,

국립도서실로, 서울대학교 도서실로 자료를 찾아 쏘다니며 일 년여를 지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저는 어떤 책임감을 느끼었습니다.

누구라도 이휘소박사의 기록을 역사에 남겨 놓아야 한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그것은 최소한의 의무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휘소 박사에 대하여 쓴다고 생각하니, 우선 물리나 핵, 원자력 등에 대하여

완전한 문외한이라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글을 쓰다가 몇 번 중단 했었습니다.

어떤 월간지에 연재하다가 중단한 이유도 그런 때문 이었습니다.
다만 전공적인 것은 핵을 전공한 분들이 어느 때인가 정리한다 할지라도 이박사의 생활에 주로

착안한 글은 일단 역사에 기록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임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문필생활을 30여년이나 하면서 이처럼 책임감을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미비한 능력이나마 정리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휘소 박사는 말할 것도 없이 20세기가 낳은 세계적인 천재요,

누구도 감히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 의심스로울 만큼 철저한 애국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분입니다.

지금까지 왜 이휘소박사가 죽었는가?

누가 죽이었는가?

항의 한 마디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라고 생각 됩니다.

이휘소 박사는 말로 애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묵묵히 실천했습니다.

이휘소 박사는 이론만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험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그는 실천하지 않는 것도 없었고, 성공하지 않은 실험도 없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는 몇 번이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는 몇 번이나 애국이란 무엇인가를,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되새겨 보았는지 모릅니다.

이 글을 쓰면서 저는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으로 몇 번이나 흥분도 했었고, 몇 번은 비애도 느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반성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앞으로 좀 더 치밀한 조사로 보충할 것, 내용이 미비한 것이나 미숙한 점은 보완해 나가겠습니다.

덧붙여 이 책의 인세 전액은 이휘소 박사 추모기념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그 기금으로 쓸 것임을 약속 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적극적 호응을 부탁 합니다.



- 편저자 공 석하 드림



주제 : 여가/생활/IT > 건강/웰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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