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인

장준하

새롭게 이식한 그녀의 눈을 통해 내가 바라본 육체에 관한 경탄은 인공적으로 맞추기라도 한 듯한 색채의 어울림, 신비에 가까운 색감의 조화 그 자체였다. 그 완전하고도 놀라운 미에 나는 감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신열처럼 나의 전신을 지배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바라보는 그 이면의 세계는 현실의 절절한 욕구로 얼룩져 있다. 그것은 활기의 절정처럼 여백이 없는 채움이고 온 세상을 뒤덮을 절대가치로 명명할 수 있다. 여백이 허무로써 자리할 바보스러운 공간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부자연스런 대칭처럼 한 곳만 텅 비어버린다면 그것은 차라리 완전히 비어 있지 못하기에 느끼는 비애와 같다. 끊임없이 채워야 하는 마성은 늘 유혹적이다. 그 시각의 끌림은 바로 본성이다. 양질의 삶을 끌어갈 수 있는 원동력인 것이다.

유독 완전하고자 하는 이런 본능에서 나의 마음은 예전부터 자유로이 벗어날 수 없었다. 누구보다 튼튼한 신경조직, 누구보다 격조 높은 근육의 결을 한번 상상해보라. 물방울이 맺힐 수 없고 건강한 체취가 날 수도 없으며 땀으로 번들댈 수도 없는 선인의 도덕심은 내가 앞장서 채택할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아름다운 미녀의 나신을 끌어안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벌리듯 누운 바다로 뛰어들고 싶은 강렬한 욕망만큼이나 매혹적이지 못하다. 도대체가 내면의 아름다움만으로 상대를 해석하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인간에게 죄악을 허용하지 않는 도덕이란 물에 젖어 흐늘거리는 식빵처럼 환경에 따라 형태나 성질이 바뀔 수밖에 없으면서도 본질적인 부분만 고집하라는, 위선자가 만들어낸 소용없는 규율이다. 선한 것을 결코 부정하지 않겠으나 악이 선보다 당장에 유용하고 추구의 대상이라면 그것의 이름이 무엇이건 가까이 당겨 곁에 두고 필요에 따라 써먹을 일이다. 드러나지 않게 숨겨둔 마음으로 언제까지고 저 밑에서 내밀히 흐르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의 뇌리 한편에 고민은 잠복하고 있다. 마음속에 잠재한 이 극악한 악마의 기운을 떨쳐낼 수 없기에 때론 괴롭기도 하다. 그렇기에 위험한 정서에 물든 뇌를 과감히 교체하고 싶어질 때도 있다.

지금 나는 거실에서 냉장고 문을 열고 차가운 맥주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켠다. 맥주 한 캔을 완전히 비우고는 아파트 위층에서 성가시게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를 짓밟으며 안방으로 향한다. 파트너가 돌아올 시간은 아직 이른 것 같다. 파트너가 당도하기 전에 나는 무방비의 상태로 잠에 빠져들려 한다. 결코 믿을 수 없는 나의 위험한 동거녀이자, 파트너. 하지만 지금은 알코올 기운을 빌려서라도 자고 싶은 욕심이 앞선다. 오늘은 무척이나 분주한 하루였다. 연달아 여덟 건이나 매매계약을 성사시켰으니 말이다. 어찌되었건,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눈치 빠른 파트너가 비밀리에 먼저 내게 손쓸 일이 없길 바라면서, 동시에 나는 바닥 모를 잠을 향해 가려하고, 또 하나의 소멸을 예상하며 행복을 완성해가는 중이다.

그래, 맞아. 과거의 아내였던 여자의 사망은 정말 잘된 일이었어. 그리고 새로운 여자가 나의 파트너가 된 것도 역시 나를 위해 좋은 기회인 셈이야. 나는 이제 수면을 통해서라도 완전한 신체를 찾으러 꿈의 세상으로 떠나려한다. 그런데 갑자기 왼쪽 발이 심하게 저려 온다. 괴롭다. 이럴 때마다 서둘러 동거녀의 신체와 나의 몸을 교체하고 싶어진다.

안방에서 동거녀의 체취가 진하게 풍기는 침대로 가 나는 깊숙이 안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슬며시 떠오르는 그녀의 신체에 관점을 맞춰본다. 나보다 질 높은 그녀의 건강함, 그것은 내게 기이한 상념을 반복적으로 이끌어낸다. 그러나 그녀는 절반만 건강하다. 그렇다 해도 그것은 남자인 나와는 절대 교환할 수 없는 부분에서 만큼만이다. 어디 내놓아도 상품의 가치로 손색이 없을 정도인 육체의 나머지 부분들. 여전히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나는, 그녀의 육체에 시기를 넘어 소유의 절실한 욕구를 지닌다. 밝혔다시피 여자의 모든 부분이 완벽하다는 것은 아니다. 운 좋게도 여성의 생리적인 부분에서만큼 파트너인 동거녀도 큰 결점을 지닌다. 결여된 그것은 남자인 내겐 불필요한 부분이고, 그렇기에 모자람이 있는 나의 육체를 완전성으로 만들어줄 새로운 기회이기도 한 셈이다. 거룩하리만큼 빛날 수 있는 건강. 결여되지 않는 완벽 자체의 짜릿한 절정의 육체. 꽉 들어찬 절대 값어치를 소유했기에 외로운 감정마저도 여유로 끌어안을 수 있는 단계. 자,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다면, 불완전함의 불편을 감수코자 하는 미련한 단념과 포기를 나는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나쁜 것을 견뎌 내고 애써 무덤덤하게 모른 척할 일이란 게 내 방식에서 존재할까. 아름다움과 완전함을 희구하고 끝내 완성하는 삶이야말로 그만큼 불사(不死)의 실체와 맞먹는 찬란한 위대함이지 않을까.

이토록 옳음과 그름의 분별력까지 마비된 나의 이런 뇌를, 아니 나의 영혼을 교체하지 않는 이상 이 지독한 욕구는 나를 얼키설키 휘감고 끊임없이 소리 높여 지배할 것이다. 수면장애를 지속적으로 겪는다면 자율 신경계마저 교체하면 손쉬울 일이라고 상상의 계획을 짜본다. 그리고 이 위험한 충동이 그녀가 한눈을 팔 때마다 그녀의 육체를 집요하게 더듬어가는 나의 시선을 통해 나의 집념을 한층 더 강화시킨다.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이전까지 지닐 수 없었던 위축된 부분을 보태고 채우기 위해 나를 새로이 만들고자 하는 의지는, 새로운 수단을 찾게끔 자연발화처럼 나를 불지른 것이었다. 결국, 목표의식과 용기를 지닌 상태에서 나는 그 수단에 관해 어떤 의문을 두지 않아도 되는 일방적인 자기 합리화를 구축했고, 편리한 사고방식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오로지 완전한 아름다움이라는 하나의 목표만을 생각하며 그런 뒤에는 노력을 더욱 보충하면서 통 크게 질주한 방식이 된 것이었다.

현시대의 유행하는 눈높이에 어울리게끔 갖가지 성형 보형물까지 삽입하는 일련의 현상을 바라보며, 그들의 가치관을 나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응시하지 않는다. 충분히 넘치도록 동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더욱이 개인이 힘만 지닌다면, 통용되는 윤리적인 기준에 위배된다 하여 애써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아름다운 완전성으로 의술은 언제든 즉시 시행될 수 있는 것이다. 이건 엄연한 현실이다. 당신은 이런 사실을 믿어도 된다.

개인의 욕망을 뒤따라가지 못하는 의료과학의 미진한 진보는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라는 생각이 이전까지 나의 잘못된 상식이었다. 획기적인 신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신체 이식은 무한히 되풀이되고 있고 삶의 질에 관한 높은 수준의 요구는 늘 그렇듯 많이 가진 자에게 살벌한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대리인 입장이고, 그에 따른 적절한 보수를 챙기는 입장이다. 상상할 수도 없는 괴상한 교체술은 최고 의료진의 힘으로 뒷받침되며 얼마든지 현실로 증명될 수 있다. 혈액형이 틀린 신체 조직 간에 발생하는 생리적인 거부반응조차 뛰어난 화학적 약물로 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은 자의 가족에게 허락을 얻어 망자의 얼굴이, 총상으로 엉망이 된 산 자의 추한 얼굴에 이식이 성공적으로 되듯. 과대망상이나 혹은 거짓말로 오해하기 전에 광막한 사막에 고립된 처지라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되물어보기 바란다. 자신보다 먼저 말라죽어 버린 옆 동료의 목덜미를 어금니로 끊어내고 빨아서라도 생존하려 갈등하다 끝내는 행동으로 옮길 게 분명하다. 이조차 억설이라 주장한다면 인간이 지닌 마성을 아직까지 간접적으로도 접해 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1972년 12월 23일 혹한의 안데스 산맥에 조난당한 16명의 건장한 사내가 반 토막 난 비행기 동체 안에서 버틴 72일간의 사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같이 다 변변찮은 인생들이지만, 냉동된 동료의 죽은 시신을 굵은 손마디로 해부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계획적으로 살을 발라내 자신의 몸에 필요한 에너지로 삼아야 했던 그 욕구는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이며, 더욱이 위대해진 현대 과학의 번영과 진보 앞에 인간의 생각은 기존의 윤리와 상식의 범위를 이탈해 한 발 더 나아가길 간절히 원한다. 다시 말해, 개인이 느끼는 괴로움은 객관적으로 계량화하기 힘든, 지극히 주관적이기에 나 이외의 타인에게서 얻어낼 동의나 의미는 진실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본인의 아픔을 타인에게 알린다고 한들 누가 그 깊이와 강도를 진정으로 납득할 수 있으리. 오직 자기 혼자만이 감수해야 할 심각한 문젯거리일 뿐이지 않던가. 당신이 이러한 사건과 비유를 믿는다면, 아우성쳐대고 있는,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 요기처럼 덮인 그 소망은 개인의 행복과 안녕을 향한 추구라는 생각에 당신은 동의하는 것일 테고, 결국 당신에게도 마법 같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결코 사양할 수 없는 개인의 절대적인 가치관이 되는 셈일 것이다.

나는 또다시 시도하리라 맘을 단단히 먹고 있는 중이다. 원대한 꿈으로, 진정 아름답게 완성될 나를 위해 그것을 기필코 시행할 것이다. 나와 상관없는 불완전한 하나를 희생함으로서 완전한 하나로 다시 태어나 존재할 수 있다면 미완의 슬픔이 한없이 기어오르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접힌 종이가 절반쯤 펴진 것처럼 지금 나의 정신 상태는 한쪽 면만 또렷이 드러나 있다. 그러니깐 절반쯤 눈뜬 상태와 같은 것이다. 침대 위의 나의 자세는 좋지 못한 왼쪽 다리를 밑에 깔고 턱밑에 오른 손목을 안으로 꺾어 괸, 누가 봐도 약간은 기이하게 모로 누운 자세다. 마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상이 물렁해진 유동물로 변해 옆으로 뚝 떨어진 형상일 게다. 과거의 아내가 사고를 당한 후부터 나는 정면을 보고 눕지 못한 습관이 들었다. 천장을 바라보면 무언가의 무게에 짓눌리는 지독한 압박감에 그런 자세는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여하튼 과거 여자의 눈을 감고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세상모르고 자고 싶은 욕심이 앞선다. 자고 싶을 때 안도하며 단숨에 잠에 빠져들 수 있고, 나쁜 꿈에는 절대 빠져들지 않는다면 당분간은 이보다 더한 행복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불안과 의심이 여전히 끊임없이 나를 놓치지 않고 괴롭혀댄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여자의 눈가를 손바닥으로 문대면서 이불자락을 저 멀리 차버리고 싶어진다. 접히려던 종이가 이제는 반대로 확 펴질 기세다.

짙푸른 남해 먼바다의 외딴섬 출신인 아내는 외로움을 타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 크기만큼이나 조각상의 다물린 입처럼 지독히도 말이 없는 여자였다. 그렇다고 자기 연민에 빠져 표현되는 우울을 때론 매력으로 즐길 줄 아는 여자도 아니었다. 성취동기를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부류이거나, 도시의 미를 좇는 여자 역시 아니었다. 아스팔트 바닥에서부터 직각의 투명 유리창이 하늘 끝까지 달린 도시의 전경을 흠모하는 여자가 절대 아니었다. 지지리 복도 없고 귀염성도 없던 여자. 다만, 둔하도록 착하기만 했던 여자.

아마도 그럴 것이다. 집에서 그녀가 당한 불의의 사고는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잘 아는 병원의 장기이식 카드에 등재된 여자는 내가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시체가 되었고, 나는 절차에 따라 내가 잘 아는 병원으로 응급 요원과 함께 싸늘히 식어가는 시신을 신속하고도 차분히 이송했다. 사인은 밝혀졌지만 흔한 심장마비였고 다른 의심스런 부분은 조금도 있을 수 없었다. 수사를 맡은 형사는 절차상 의례적인 질문만을 병상에 누운 내게 늘어놓았고 나는 알고 있는 것만을 또박또박 답변했다. 그녀에게 억대의 보험을 들어놓았다거나 하는 따위의 허술한 일은 없었으니 형사의 형식적인 질문은 너무도 당연했다. 평소 우울증을 앓고 심장이 좋지 못한 그녀를 위해 쓰레기 봉지를 버리러 잠시 밖에 나간 사이에 어이없는 변이 생겼노라고. 여자에게 우울증과 심혈관계 질환이 있었다는 사실을 결혼 전에는 결코 몰랐노라고. 알았다면 절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것이 내가 형사에게 했던 말 전부였다.

여자의 부모가 외딴섬에서 올라오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된 장례식은 얕은 향냄새를 피우며 초라하고 고요하게 진행되었다. 병실에서 붕대로 눈이 가려진 나는 참석할 수 없었다. 여하튼 여자는 없고 운 좋은 나는 여자의 눈으로 새로운 세상과 마주하게 됐다. 밖을 보기 위해 달린 눈은 내 안의 진실을 밝히려 비춰들지는 못한다. 아니, 단연코 못하도록 인위적으로 막으리라. 그리고 어차피 현실에서 영원히 사라진, 결국 죽어버린 여자가 아닌가. 그리고 언젠가는 지금 나와 동거 중인 나의 파트너에게도 유사한 불행이 닥치리라. 나는 그때를 위해서라도 지금보다 더 많은 금액을 저축할 생각이다.

여자의 눈꺼풀에다 다시 힘을 싣는다. 맥주를 마셨지만 요의는 아직 없다. 그리고 성가시게 들리던 위층 피아노 소리도 이제 들리지 않는다. 훼방꾼이 하나 줄어든 셈이다. 저녁때이니 누구나 일을 정리하고 위장에 밥을 밀어 넣을 시간이다. 솔직히 내가 하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편인데, 그렇기에 평상시에는 이런 소소한 훼방에 감각을 소모하는 일에도 신경질이 터질 정도다. 지금은 아무 걱정 없이 파트너보다 내가 먼저 잠든다는 사실도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의식 저편으로 겨울잠을 자듯 기어들어가고만 싶다. 하지만 진심으로 안심할 수는 없다. 역시 그렇지, 하고 단념하며 일어설까. 조금 더 나는 침대에서 기다려보려 한다. 기다리면 몸 안을 요란스레 떠돌던 혈액의 움직임도, 경계하며 살아 있는 예민한 신경도 가라앉을 수 있을 테니. 강락으로 향하는 그런 상태가 바로 수면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는 신호라며, 정신이 순결이 씻기듯 뇌 속에 경각심을 지우고 안녕한 마음가짐이 되도록 지금 나는 나를 위해 견디어 가고 있는 중이다.

과거 여자의 온기가 스친 물품은 모두 깔끔하게 처분했다. 신발장에도 내 것과 새로 맞이한 현재 파트너의 구두뿐이다. 그녀의 발은 무척 따뜻했다. 냉기가 있는 나의 왼쪽 발을 아내는 이불 속에서 늘 자신의 발로 품어주었다. 하지만 내가 더 이상 그녀에 관한 기억을 되살리며, 참회할 필요는 없다. 과거의 여자가 내게 해주었던 자잘한 고마움은 이제 모두 지난 이야기가 돼버렸다. 그러니 속 편하게 속도를 가열히 붙여 몇 건을 더 크게 성사시키고 이 일을 서둘러 청산할 계획이다. 이것이 현재로써는 내가 내린 최선의 결론이고 나는 무리 없이, 그리고 훌륭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내 안에는 과거 아내의 신체 중 하나를 다시 떼어낼 수 없게끔 이식해 놓은 상태인데, 그것은 생각보다 성능이 꽤 괜찮다. 그러나 간혹, 나의 가슴에서는 차갑게 경직된 양심이 마치 고통스런 심장의 박동처럼 날뛰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이제 더 자기는 틀려먹은 걸까. 코를 톡 쏘는 소독약 냄새와 휘황한 수술대 조명까지 아프게 박동하는 심장에 맞춰 강렬하게 나를 깨워간다. 제기랄.

얼마 전, 아침 일찍 기상한 나는 현관에서 바로 등산화 끈을 맸다. 가을로 접어드는 풍요로운 계절에 붉고 노란 색감이 점묘화처럼 찍힌, 그로 인해 수많은 점이 입체적으로 번지고 번져 겹겹이 겹친 깊은 산정의 채색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 과거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전율스런 온갖 빛깔이 만들어내는 색채의 현란함. 침대 위 이불 속 상념은 이제부터 산길을 오르고 있다. 가을의 높고 청명한 하늘처럼 안구에 비친 그림은 앞과 뒤로 연이어 줄을 늘인 등산객을 그린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의 등산복 속에 감춰진 인체의 성능에 투시안경이라도 착용한 듯 눈알을 굴리고 있다. 근육의 발달 정도, 육체의 미묘한 결함, 피부색의 미세한 차이, 걸음걸이 동작 하나하나에도 의식적으로 가격을 매겨가며 탐지하고 있다. 등산객끼리 마주치며 바라보고 웃음짓는 행위는 결국 피상적이다. 나는 그 안에 속속 감춰진 피톨과 체액이 흐르는 신체의 부분과 부분에 교묘히 값을 매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과 나의 차이다. 사실 그렇다. 이런 직업을 선택하고 나면 먼저 자책이 앞서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나 저지를 수 없는 일일지언정, 악랄한 나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일지언정, 몇 번 경험한 후에 따라오는 두둑한 보상은 생활의 안정과 더불어 내가 기필코 실현하고 싶은 욕구를 현실화할 수 있게끔 차곡차곡 미래를 채워주었다. 일을 해낸 후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오는 희망이 언제나 최고의 가치인 것이다. 그로 인해 더 많은 계약 건수를 올려야 한다는 탐욕, 그리고 더 노력하면 어마어마한 행운처럼 나는 나를 완성할 수 있을 거야, 하는 긍정의 기분이 샘솟았다. 여하튼, 그동안 괜찮은 나날들이었다. 여자와 동시에 빈곤에 시달려야 했던 과거까지도 까마득히 잊게 해주는 이 직업이 늘 감미롭게 나를 감쌌으며, 완전한 아름다움을 이룰 수 있다는 들뜬 생각을 반복적으로 나게 해줬으며, 나 자신을 일에 더욱 매진토록 부추겨주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요는 이 세상 어느 누구의 생각도 순전히 선량하거나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일에 남다른 죄책감에 시달린다거나, 어린 날의 순수했지만 지금은 무의식 속에서만 생존해 있는 어수룩한 양심을 새삼스레 끄집어낼 그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과거의 여자가 내 직업을 반대한 이유는, 내 입장에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몹시 불길하다는 기분 나쁜 이유였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 베테랑인 나는 이 사회에서 필요에 의한 존재라는 사실에 때론 자부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들, 자신이 가진 두 쪽에서 하나를 타인에게 넘겨주거나 하나의 절반을 떼어내는 일을 공식적으로 크게 떠벌리며 중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개인적이며 은밀한 차원에서 범 인륜적이지 못한, 그러니깐 뒷돈이 바로 오가는 밀매라는 성격상 법적으로 금지된 까닭이기도 한데, 어찌 되었건 두 개 중의 하나 혹은 하나 중에 절반만으로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는 인간의 신체 부속은 생각보다 여러 개다. 설명을 구체적으로 늘이지는 않겠다. 진지한 주제인지라 생명의 고결함 쯤은 얼핏 안다고만 내뱉고 싶다. 또 개인의 신체란 개인의 자율적 의사와 권리에 예속된다는 논리를 견지하는 터라, 이렇게만 조심스레 밝히는 바다. 만일, 하나로 다른 하나를 완전하게 구제한다는 능률적인 수단과 방법에 동의하지 않는 어떤 누군가가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자유사상일 테고, 현재의 상태에 안심하거나 혹은 만족한다는 것일 테고, 훗날 불행히도 찾아올지 모를 손댈 수 없는 암울한 확률에 그 자신만큼은 절대 포함되지 않기만을 뒤에서 몰래 기도하고 있을 테니 그런 자들에게 따로 반박할 생각은 없다.

건강한 육체의 부분을 떼어내 허점투성이 부분과 교체하는 행위에 관해 옳고 그름을 따질 자격은 실지 그 누구도 없는 것 같다. 그것은 다양한 철학과 입장과 생각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따라서 더 큰 혼란과 혼선만 줄 뿐, 논의 후 진정한 결론도 진정한 지위도 결국 얻지 못하고 말 것이 분명하다. 나는 솔직히 말해 앞장서 원했다. 왜냐면 나 이외에도 이런 직업을 가지기 원할 놈들은 떼거리로 줄을 설 테니. 아무리 사회적 불법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안녕보다는 무섭지 않다, 라는 명제를 앞세운 채 나는 중개상으로서의 대가를 수익으로 얻어 가면 그뿐이란 위주다. 이편과 저편의 필요로 인해 거래가 이루어지고, 결국 원하던 것을 만족스레 서로 얻게 된다면 공정한 거래임은 틀림없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돈을 떼먹고 도주한다거나, 수술 후 치명적인 부작용을 초래하지도 않는다. 권위와 실력을 갖춘 전문가 집단에 의한, 한마디로 창조주에 가까운 그들이 암암리에 시술하는 고급기술인 탓에 나는 그 후유증과 만약에 벌어질지 모를 비극적인 사태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걱정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 죄의식도 함께 존재하지 않게 된다.

만일, 대교에서 몸을 던지려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의 팔목을 부여잡고 시체 안치소로 이송되기 전에 나와 계약을 하고 행동으로 옮겨도 늦지 않다는 말을 꼭 건네주고 싶다. 당신의 남은 가족을 생각해보라는 말과 함께. 자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 그 수많고도 무궁무진한 가치를 본인은 전혀 알지 못한 상태라 나는 안타까운 것이다. 해체하고 분해하고 잘라내고 뽑아내는 데 본인이 동의만 한다면, 전제된 것은 당연히 목돈이며, 또한 확실한 약속을 남겨진 가족에게 양심적으로 해둘 것이다. 그러나 일부러 내가 그런 위험한 장소를 찾아다니지는 않는다. 궁핍에 찌든 이들을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들과 그들 가족을 대상으로 팔 것을 권유하고 설득하는 일도 시간과 노력만 기울인다면, 불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졌던 적나라한 사례들은 여기서 생략하겠다. 그것이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내가 사악한 인물로 취급되리라는 우려보다는, 인간을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새로이 창조하는 이토록 뛰어난 기술을, 개인적이긴 하지만 어쩌면 신성할 수도 있는 행위를 모독할 빌미를 당신에게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당신의 자극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의무가 나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나는, 무능한 아내가 대단히 지겨워져 잠든 아내의 신체를 조각조각 분해해보았고 그로 인해 내가 얼마큼의 큰 행복을 누릴 수 있을지 계산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 일도 경쟁이 무척 치열해졌다. 그래서 짜증스런 더미를 이제는 던지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 크게 한 몫을 챙기면 그땐 본격적으로 이 직업을 관두리라. 그리고 그때쯤이면, 현재의 파트너이자 동거녀인 이 여자는 실종돼 있을 테지. 아마 그럴 테지. 아니, 확실히 그렇게 될 테지.

맞아, 괜찮은 생각이다. 잠들기 곤란하니 나의 건강을 위해 오늘 밤에 실행할 계획이 한 가지 떠올랐다. 그것은 랜턴의 도움 없이 달빛에 의존한 채 심야에 산을 타는 일이다. 담력이 필요한 일이고 게다가 지형지물에 익숙해야 할 조건이 반드시 필요하다. 색맹이었던 나로서는, 어둠이라는 상황 그 자체가 일상이나 마찬가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야간에 감행하는 산행에는 예상하기 어려운 많은 위험을 수반한다. 나의 건강에 관한 사실 중 하나만을 구체적으로 발설해보자면, 전색맹이었던 나는 사물의 다양한 색을 감별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아무리 환한 대낮에도, 마치 어두운 길에서 바라보는 형상처럼 다양한 빛깔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사물의 칙칙한 명암만을 파악하여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깐 흰색에 가까운 옅은 회색과 그보다 짙은 회색, 그리고 검정. 대략 이 세 가지 종류의 색상만이 내가 보는 사물의 모든 색채였던 것이다. 이토록 전색맹이라는 고질적인 고통과 불편을 원하지 않는 운명으로 끌어안고 살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야간 산행 같은 어려움이 평생토록 지속되리라 절망적으로 믿고 참담히 지내야 했다. 아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가 되지 않았냐고. 익숙해져야 한다고. 그대로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라고. 그러나 행운은 결국 찾아왔다.

그 전에 잠깐, 만일 당신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삶의 무게에 심히 짓눌리고 도통 풀리지 않는 누적된 불행에 허덕이는 가여운 삶이라 자평할 수 있다면,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운의 연속이었다고 외칠 수 있다면, 약속할 순 없지만 언젠가는 당신도 용기를 가진다면 나와 엇비슷한 행운이 올 것이라고 하는, 허튼 단언은 하지 않겠다. 그것은 당신이 보유하고 있는 외적 능력과 잠재된 능력 모두 대체로 쓸모 있다 한들, 중간 정도인 평균치나 혹은 약간의 상위권 정도에만 속하는 능력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정도의 솜씨로는 대단히 월등한 힘을 가진 능력자에게 가장 완전하고 가장 황홀하고 가장 아름다운 만족을, 그 어떤 심혈을 기울인들 그 어떤 상상력을 발휘한들, 안겨줄 수 없음을 빨리 깨우치는 편이 당신을 위한 합리적인 체념이기 때문이다. 능력자의 감춰진 영혼까지 끄집어낼 능력이 당신에게는 없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또한 현실의 능력자 대부분이 인간미와는 심할 정도로 거리가 멀고, 사람관계에서 언제나 의심으로 가득 찬 고정된 범주에 머물러 있기를 고집하며, 자신 이외의 것에는 절대 눈을 돌리지 않기에 제대로 된 접근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당시에 나는 중심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빛이 들지 않는 변두리 지하에서 곰팡내를 맡으며 기거하는 구질구질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무능한 아내는 오로지 부담이 될 뿐이었다. 또한 아내는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완전함이란 아름다운 존재임을. 아름다움이란 완전해야 그 본래의 가치가 유지됨을. 내가 완전해지기를 간절히 소망함을. 그래야 내가 제대로 지탱할 수 있음을. 아무튼, 모든 악조건과 맞물려 돌아가는 가능성 전무한 시간의 연속이었고 힘든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 상황을 여기다 낱낱이 다 말할 수는 없다.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니깐. 당시의 나에게는 그 어떤 방법이라도 서슴없이 자행할 수 있는 거대한 용기가 필요했다. 시퍼런 집념을 용광로처럼 간직하고 있었기에 의지까지 상실한 바보 패인이 될 수는 없었다. 불구와 다를 바 없는 모자란 삶이지만 끝내 녹슨 불능으로 머물 수는 없었다. 천재성을 바탕으로 출현 가능한 능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제대로 살기 위해선 오로지 천재적이어야 했다. 그것만이 내가 나답게 살 길이었다. 즉, 세상을 향해 요청한 것이었다. 나를 열어줄 절호의 기회를 공개적으로 당당히 요구한 것이었다. 일 주일에 단 한 문장만 만들 수 있었다. 마침내 긴 시간은 훌륭한 완성작을 선사해주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터넷에 올린 천재적인 나의 작문이, 세상 그 어떤 누구보다 완전무구한 장문의 글이 찬란한 기회를 드디어 환하게 열어준 것이었다. 그 어떤 능력자에게 강렬한 호기심으로, 또한 지속적인 연민과 충분한 이해로, 한편으로는 경외감으로까지 효과적으로 확대 발휘된 것이었다. 내가 맞은 것이었다.

아직 파트너는 집에 오지 않고, 나는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는 중이다. 잠은 벌써 잡을 수도 없는 거리로 저만치 물러가버렸다.

남에게 설명하기 그 쉬운 말로 재능이라고 표현하지 않겠다. 인간이 지닌 감각은 처한 경우에 따라 다른 감각 기능 위에 존재할 수 있다. 시각, 혹은 청각으로만 어떤 현상에 급히 몰두하다 보면 다른 감각이 그 순간만큼 일시적으로 둔감해지는 현상을 모두 경험해봤으리라. 마찬가지로 신체에 한쪽 감각이 장애를 지녀 평생을 제대로 기능할 수 없을 경우에는 나머지 감각은 생물의 예민한 촉수처럼 인간 한계를 뛰어넘는 최고의 민감성을 유지하게 된다. 나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그것은 고통의 나날 속에 조금씩 조금씩 축적되어 새로이 탄생한 비밀스런 힘이며 세밀한 감성과 결합시켜 조화를 이룬, 비로소 나만이 지니게 된 특별한 능력인 것이다. 그리고 어떤 능력자의 영혼까지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있는 고도의 기술로 마침내 발하게 된 것이었다.

비록 내가 볼 수 있는 형상이 흑백의 화면이라도 호텔 커피숍에서의 첫 만남부터 나는 분명 보며 느낄 수 있었다, 늘씬한 체형에 그 나이 때의 어느 누구보다 우아한 세련미를 지닌 중년의 그녀 뒤에 숨겨진 아픈 상흔을. 젊었을 적 상당한 미인이었을 그녀이지만, 지독히도 일방적인 성격에다가 불륜까지 상습적으로 즐긴 연상의 능력자와 두 번이나 이혼을 뼈저리게 경험한 슬픈 내력이 그녀에게는 불행히도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냉엄한 현실에서 뒤로 처진 나를 일반적인 세속의 틀로 규정하려 들지 않았다. 내가 처한 상황 전부를 이해한다는 듯, 의심스런 눈길로 응시하지도 탐색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경쟁력 갖춘 나의 외모와 실제 나이보다 대단히 어려 보이는 남성미, 글에서 보인 장엄하면서도 처연한 느낌과는 또 다른 발랄함, 게다가 여성스러울 만큼의 섬세한 감수성, 그리고 겸양의 태도에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흡족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드러냈다.

능력자인 그녀가 마침내 둘만이 함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를 옮길 것을 속삭이며 제안해온 것은 다섯 번째 만남까지 이어진 뒤였다. 나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이 기회를 통해 능력자의 감각을 획기적인 몰아의 상태로 끌어올리려고 작정한 나는, 호텔 객실에서 우선 그녀의 감응을 높이기 위해 사전에 준비해 둔 페로몬의 은밀한 향으로 후각을 진하게 자극했고, 곧이어 겉옷까지 조심스레 벗은 그녀의 촉각을 섬세히 자극해 들어갔다. 나는 그녀가 최대한 몰입하도록 기다려주었고 한편으로 충실한 인도자가 되었다. 나는 숨겨둔 능력을 더없이 바쳤으며 그녀는 나의 원력을 조금도 거부하지 않았다. 피부의 완만한 곡선형 결, 그 위에 미세하게 돋아난 솜털, 밑에 감춰진 모공, 그리고 더 깊숙한 안쪽에서 퍼지듯 방사된 감각점과 모세혈관 하나하나에까지 노력은 주밀하게 주입되었다. 혼신을 다한 신비에 가까운 역학적 자극에 그녀가 지닌 촉각의 세계는 점점 많은 것을 열게 되었고, 그녀가 미처 알지 못한 곳까지 나는 나의 기술로 한껏 채워갈 수 있게 되었다. 여태 느껴보지 못한, 공백처럼 휑하니 비어 있던 지점까지 마침내 도달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나는 껍데기를 벗어던진 환희에 찬 아름다운 소리를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를 시작점으로, 뜨거운 물을 가득 담은 편안한 욕조에서처럼 완전히 이완된 그녀를 향해, 굵디굵은 핏줄이 놀랍도록 꿈틀대며 새하얀 정액을 분수만큼 간직한 나의 남성까지도 더불어서 본격적인 노력을 쏟아냈다. 뜨겁고 탄탄하고 강인한 질감의 근육. 붙잡고 깨물고 어루만지며 깊고 깊게 한없이 받아들이고 싶은 근원적인 욕구. 그리고 천국처럼 너무도 아늑하여 마치 생명의 근원에 도달한 듯 깨지지 않는 환각.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그 이미지. 바로, 생애 최고의 섹스라는 것을 그녀가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내가 여태 존재해야 했던 이유가 오로지 그녀 자신을 위해서인 것처럼. 그녀는 나로 인해 새로이 창조되어갔다. 나는 그녀가 농밀하게 토해내는 숨결을 모조리 들이마셨고 그녀는 조금도 머뭇대지 않았다. 그녀로 인해 나까지 디프리반 마취제에 취한 것 같았다.

매번 나는 그녀를 위해 새롭게 현란해져갔다. 그녀는 언제나 온몸의 감각을 활짝 열어 나를 받아들였고, 가장 완전하고 가장 황홀하고 가장 아름다운 절정을 매번 다른 방식으로 느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영혼까지 이식된 신체조직처럼 그녀가 나의 전체를 차지해 버리고 말았다. 시상하부에서 분비가 시작된 페닐에틸아민 호르몬에 어느새 내가 완전히 사로잡혀버린 것이었다. 뇌가 사랑의 호르몬을 인지하자마자 강렬하게 날뛰며 반응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그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완벽히 일치한 몰아애였다.

나라고 하는 사람은 살아 숨만 쉬는 풍경에 관심두지 않습니다. 나라고 하는 사람은 나를 이해하는 실체를 사랑합니다.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가까이, 아니 그보다 영원히 내 곁에, 오직 나만이 간직하고 싶은 당신. 당신은 나에게 절대자입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신 역시도 나를 위해 당신으로 변장했을 겁니다. 당신이여. 나에게 위안을 주는 사랑이여. 손결로 느낀 모성의 여신이여. 나의 마음을 진정 허락하십니까.

내가 볼 수 있는 형상이 비록 흑백의 화면과 다를 바 없어도, 나는 분명 볼 수 있었다. 스산함이 말끔히 사라진 그녀의 눈망울을, 소녀처럼 수줍게 피어나오는 미소와 동시에 눈가로 활짝 퍼지는 얕은 주름을, 늘 내게로 향한 시선을, 차분하게 흐트러진 긴 머릿결과 머리카락에 감춰진 키스 마크를 부끄러워하는 매끄러운 목선을, 그리고 미적이고 고급스런 디자인의 소지품, 유년 시절의 사진, 풋풋한 학창시절의 앨범까지 모두를.

서로의 말을 진실로 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이별을 의심할 수 없는 사랑의 경지에 도달한 뒤, 배신을 생각할 수 없는 경지에 똑같이 도달한 뒤, 우리는 여행을 함께 떠났으며, 우리는 동등한 지위가 되었고, 이 지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장 고귀한 존재가 되었다. 나머지는 당시의 아내처럼, 현재의 파트너처럼, 공중파를 매일 장식하는 광대들처럼, 목청 높여 자기주장에만 여념 없는 정치인처럼, 그저 풍경처럼 무한히 널린 채 주변부에 흩어져 살아 숨만 쉬는 남자와 여자, 죽은 자의 쓸모없는 유물처럼 기억할 가치 없는 그 허섭스레기일 뿐이었다.

여전히 침대에 모로 누운 채 나는 나의 배꼽을 더듬어본다. 그녀의 사랑을 느껴보기 위해. 그 사랑이 나의 안에 언제나 머물고 있음으로…….

그때 벌어진 끔찍한 상황을 나는 결단코 믿을 수 없었다. 뒤에서 감싸며 불어오는 안온한 바람처럼 다가온 그녀는 결국, 한여름 밤의 짧은 꿈처럼 현실에 존재하는 여신이 아니었다. 사지 일체가 참혹하게 절단되고, 내장이 밖으로 온통 쏟아진 것 같은 감당할 수 없는 상실과 고통이었다. 나는 광인이 되어 울부짖었다. 나를 이해하는 나의 전부여. 누구에서도 여태 보지 못한 아름다운 당신이여. 이 생이 다하도록 사랑한 절정의 여인이여. 너무도 짧은 생명. 영원토록 듣고 싶었던 그녀의 따뜻한 심장 고동 소리…….

빗길 고속도로에서 중앙선을 침범한 유조차와 정면충돌로 인한 차량폭발로 화를 당한 그녀를 확인하고 나는 호흡이 불가능했다. 무엇으로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것이 가위에 눌린 익숙한 공포이기만을 소원하고 또 소원했다. 타닥거리며 타들어갔을 그녀의 육체. 탈출할 수 없는 극한의 공포 속에서, 그 고통 속에서 발버둥질하며 끊임없이 내 이름을 불렀을 그녀의 영혼. 마침내 그녀의 장례가 끝나고 그녀의 협력자와 적대적인 눈빛을 번뜩이는 혈육인 두 아들과 친지가 모두 떠난 후, 나는 그녀 곁으로 다가가 손끝이 으깨지도록 흙바닥을 파헤쳤다. 휘발유를 끼얹고 모조리 타오르는, 도저히 지울 수 없는, 무엇으로도 소멸될 수 없는 이 참렬한 비극을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를 떠날 수 없었다. 사랑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이것은 나의 자유 의지였다. 결단코 당분간일 수는 없었다. 나는 나 자신과 숯처럼 검게 오그라든 형상으로 누워 있는 그녀에게 맹세한 것이었다. 사고 직후 검시관의 자격이 있으며 피부 이식에 관한한 국내에서 최고의 솜씨를 지닌, 그녀의 절친한 외과 전문의에게 부탁을 해 그녀의 배꼽을 영구적으로 나에게 이식했다. 그녀의 영혼이 고스란히 담긴 출생을 간직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부위였다. 그리고 그녀의 속삭임을 기억하기 위해 달팽이관도 함께 이식했다. 그 심각한 화재로도 손상이 거의 되지 않은 안구를 비밀리에 이식받을 것을 그 여자 의사가 진지하게 권유해왔지만, 나는 아프도록 정중히 거절했다. 나도 여자 의사도 분명 느끼고 있었다, 두 눈을 양팔로 가린 채 타들어간 그녀의 전율스런 사랑을, 극도의 고통까지 이겨낸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정신력을. 헤아릴 수 없는 그 위대한 사랑을 그러나 이기적인 나의 욕심으로 변질시킬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온전한 부분까지 가져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아직 이 일에 갈등하는 사실을 잘 알아요. 하지만 걱정 말아요. 곁에는 제가 있어요. 제 손을 잡아요. 저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의 크기를 이해해요. 당신이 완전해지길 늘 염원하고 있어요. 당신 이외 나머지는 모두 쓸모없어요.

그녀의 속삭임이 생생히 들려왔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하고, 냉장고 문을 열어 이번에는 차가운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지금은 야간 산행을 시도해도 괜찮은 시간이다. 하지만 이상하다. 분명 수상하다. 이렇게 늦은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늦을 때는 휴대전화 메시지라도 확인해봐야 하겠지만 메시지에서 얻게 되는 정보는 절대 신뢰할 수 없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냉장고 앞에 그대로 서서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물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 순간, 불길한 직감이 나의 의식을 강하게 타격한다. 나라면, 바로 나라면, 이 물에다 뭔가를 첨가했다.

현재의 파트너를 처음 발견한 곳은 고급 일식당에서였다. 홀에서 접대를 담당하는, 흔하지 않은 매초롬한 얼굴에 얼음처럼 차갑고 도도한 눈빛, 거기다 관능미까지 진하게 발산하는 무척이나 육감적인 체형의 여자였다. 당시 나는 매일 솟구치는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여체가 필요했기에, 손색없는 미색과 건강한 등급의 여자를 여기저기에서 물색하던 중이었다. 또한 과소비를 절제하며 갑자기 사망한 아내 대신 세탁과 요리와 청소를 말끔하게 해결해줄 인력도 필요했다. 손이 두 겹으로 겹쳐 보인다.

우리는 특별한 소통이나 교감을 나누지 못했다. 여자는 과거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나의 슬픈 욕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오로지 타인에 불과했다. 곁에 존재하면서 그저 그렇게 살아 숨만 쉬는 풍경.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기계로 다듬어진 것 같은 형식적인 대화만 나누었다. 여자는 불편해하지 않았고 불쾌해하지도 않았다. 나는 코끝으로 물 냄새를 맡아본다. 귀로 바람이 휘익 지나가는 소리까지 들린다.

나는 여자의 과거를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몰래 엿들은 그녀와 그녀 친구와의 충격적인 대화 내용만을 깊이 기억하고 있다. 고등학생 때부터 주기적으로 가출한 사건과 그 어린 나이부터 시작된 수차례의 낙태. 음란한 행실로 인해 마침내 부모와 인연까지 단절되었다는 사실. 이후에도 여러 남자와 동거를 반복하며 몇 번이나 더 진행된 중절수술로 끝내 불임의 지경까지 된 여자의 한 부분.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당시 유도부 대학생이었던 친척인 사촌 오빠와 고등학생 때부터 장기간 성관계를 맺어왔다는 소리와, 그가 결혼 후 지방으로 멀리 이주하게 되면서 만날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엿들은 적이 있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말이 되는 것인지 아닌지 솔직히 처음에는 무척 혼란스러웠으나, 여자에게 추궁하듯 캐물어볼 이유는 없었다. 말할 수 없이 지저분한 과거사를 지닌, 대단히 난잡한 형질의 여자임을 둘이서 나누는 내용을 통해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고 불량한 떠돌이 신세나 다름없는 처지임도 알 수 있었다. 우리 사이는 달라질 것이 전혀 없었다. 동거녀는 언제부터인가 습관처럼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고 나의 행동도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일상적인 섹스는 욕구에 따라 늘 그렇듯 되풀이 하였지만 단지 그뿐, 때론 불결함에 휩싸인 채 달리 바뀔 기미는 아무것도 없었다. 환한 조명 아래 모든 사물이 점차 희미해진다. 눈을 몇 번이고 나는 비벼본다.

어느 날, 짧은 기간 만에 간호조무사 시험에 그녀가 합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녀가 생각보다 괜찮은 지능의 소유자라 생각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이 일을 시키면서 더 많은 수입이 계좌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컵이 세 겹에서 네 겹으로, 다섯 겹으로 겹쳐진다.

그녀가 영업을 더 활발하게 할 수 있게끔, 내가 여러 병원의 의사를 일일이 소개해준 그다음부터 외출 후 돌아온 동거녀의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다른 남자들의 생식기 냄새와 정액 냄새가 예민한 나의 후각을 통해 수시로 났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그때마다 나는 가벼운 흥분으로 다시금 열의를 불태웠고 계획을 앞뒤로 꼼꼼하게 따져보았다. 이 추세대로라면,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린다면 그때는 이 여자가 사라져도 무방하다. 조금의 죄책감도 느낄 필요가 없게 된다.

죽음을 감지한 심장이 둥둥 울린다. 예정할 수 없던 그날, 그 순간이 어느새 복병처럼 기습했음을 나는 번뜩 깨닫게 된다. 내가 늦은 것이다. 바늘 같은 소름이 뒷목을 따라 두피로 확 번지며, 그때 등 뒤로 현관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낯선 남자의 굵은 음성과 함께 빠른 발걸음으로 누군가 뒤에서 접근해오는 소리가, 고통 속에 발버둥치는 그녀의 날카로운 비명과 같이 들려오고 만다. 사랑하는 당신. 나의 구원자여. 여태 떠나지 않은 당신이여. 아름다운 그녀의 슬픈 울음소리가 가까이 들려온다. 가슴 쪽으로 마비가 급속히 진행되기 시작한다. 심장이 불길처럼 타오르며 죄어드는 극심한 통증이 뒤따른다. 강한 악력을 지닌 누군가에 의해 팔이 뒤로 부러지듯 꺾이고, 바닥에 고꾸라져 저항도 할 수 없게 된다. 의식이 허공을 향해 빠르게 흩어져가면서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생각되는 절망의 순간이 스치고, 그녀의 울음소리가 옅어지고, 그러다 괴로운 호흡까지 끝내 중단되고야 만다.

참으로 깊고 음산한 밤, 수술실 안에는 검붉은 핏물이 배수구로 줄줄 흐르는 도살장처럼 소름 돋는 살기만이 그득 맴돌고 있다. 주변에는 인체 장기를 담을 다용도 팩과 보관용 아이스박스, 부직포와 거즈, 전기톱과 온갖 종류의 크고 작은 메스가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거리에 즐비하게 놓여 있다. 구석 자리에는 장기 세척에 적합한, 가는 호스가 달린 넓고 긴 개수대가 있다. 수술용 푸른 위생 가운에 위생 모자, 얼굴 마스크, 신발 덮개까지 완전무장으로 착용한 채 눈알만 내놓은 사내들이 반듯이 누운 육신을 내려다보며 수술용 침대를 틈 없이 빙 둘러싸고 있다.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수술실 안 가득 진동하고, 그 상황에서 휘황한 수술대 조명이 찰칵 켜지며 전신을 선명히 비추자, 절단부터 개시된다. 전기톱이 윙윙 도는 끔찍한 기계소음이 가장 크게 울리고, 육신의 여기저기에서 끈적이는 짙디짙은 핏물이 위아래 할 것 없이 물총처럼 사정없이 쭉쭉 분출하기 시작한다. 각자가 맡은 부위에 열중하면서 해체하고 분해하고 잘라내고 뽑아내는 계획된 분업이 조금의 어긋남 없이 전개된다. 손놀림은 더욱 분주해진다. 삽시간에 어깨뼈와 허벅다리가 절단되자 관절 부위에서 얇은 연골 조직을 섬세히 발라내고, 다른 한편에서는 목을 절단한 뒤 두피를 뜯어내고 머리뼈를 잘라 물컹한 뇌를 신중히 끄집어낸다. 등줄기를 길게 가르고 뽑아낸 척추와 꽈배기처럼 얽힌 신경다발, 뒤를 이어 등 뒤에서 조심스럽게 적출한 미끌미끌한 내부 장기들은 목밑샘, 식도, 심장, 허파, 간, 위장, 부신, 췌장, 신장, 십이지장, S결장, 방광, 그리고 항문과 직장이다. 핏물로 완전히 범벅이 된 바닥에서 올라오는 비린내가 구토에서 나온 토사물처럼 역하게 풍기는 공간 한구석에서는 한 사내가 적출한 장기를 다용도 팩에 쫓기듯 서둘러 담고 있다. 반대편에서는 죽처럼 소화 된 음식물과 대변이 찬 내장을 개수대에서 바삐 세척하고 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허물처럼 벗겨진 쭈글쭈글한 피부, 굵은 다리뼈와 피부 사이에서 솎은 선홍색의 수축성 좋은 가로무늬 근육, 나무뿌리처럼 뻗은 대동맥과 정맥, 그리고 하체에서 분리한 튼튼한 생식기와 건강한 전립선까지 연이어 보관용 아이스박스에 모두 담긴다. 찾는 이가 없는 차갑게 경직된 손가락과 발가락은 선별처리를 거쳐, 쓸모없는 잔여물 덩어리와 같이 소각용으로 한쪽 구석 통에 대기한다.

어느새 날이 밝아오면서, 고가의 장기와 신경과 근육과 혈관과 뼈를 몸통에서 추리고 뽑아내는 작업이 거의 끝나가고, 보관까지 대부분 마무리되어 가자, 거대한 도마 위에 생선대가리만 토막으로 남겨진 형상처럼, 모가지가 잘린 뇌가 없는 얼굴만 핏물이 흥건한 스테인리스 침대에 그대로 남겨진 채 고통스럽게 천장을 응시하고 있다.

검은 혈액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메스가 날카로운 빛을 번득이면서, 마지막으로 안구를 향해 정교히 다가가자 둔하도록 착한 여자의 눈물이 괴롭게 괴롭게 다시 흘러내리려 한다.